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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
백년의 기록 백년의 교훈
2016년 02월 06일 (토) 01:57:00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다다이즘 등장 100주년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젊은 화가들과 시인들이 무차별한 살육을 피해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광기가 초래한 엄청난 비극을 목도하면서 기존의 모든 문명과 문화를 근본부터 회의하고 부정하고 배척했다. 사회의 기준과 규범을 맹렬히 공격하며 자살 직전에 놓인 그들의 문화도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 ‘DADA’ 창간호
1916년 2월 5일 일군의 예술가, 철학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유흥음식점 ‘카바레 볼테르’에서 개최한 장르복합적 문화이벤트도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기존 문명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었다. 시인이자 연출가인 위고 발,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 독일의 시인 리하트르 휠젠베크, 알자스 출신의 조각가이자 시인 장 아르프, 루마니아 출신의 화가 마르셀 얀코 등 참석자들은 저마다 시를 낭송하고 입체주의 춤을 추고 아프리카 음악을 들으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얀코는 그 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란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다.
이후에도 매일 저녁 시끌벅적한 공연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언쟁에 그치지 않고 난동을 부릴 때도 있었다. 기존 사회의 예술적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성과 제도 속에 억압되어 있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것이 이벤트의 목적이었지만 일반인들의 이성적 관점에서 이런 행위들은 극히 비정상적인 기상천외한 기행의 연속으로 보였다.
그들은 1916년 6월 ‘카바레 볼테르’라는 제목의 잡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간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얀코, 피카소, 칸딘스키, 마리네티, 모딜리아니 등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위고 발은 서문에서 ‘다다’란 말을 사용했는데 ‘다다’란 말이 활자화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를 발간하기 전, 그들은 사전을 펼쳐 아무렇게나 골라낸, 프랑스어로 장난감 목마를 의미하는 ‘다다(Dada)’를 집단의 명칭으로 채택함으로써 이른바 ‘다다이즘’을 탄생시켰다.
이후 다다이스트들은 ‘다다(DADA)’라는 제목의 잡지를 1917년 7월부터 3회에 걸쳐 발간하고 1918년 ‘다다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과거의 예술 인습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새로운 예술 활동을 펼쳤다. 이른바 ‘다다이즘’이 한 시기의 중요한 예술 사조로 자리잡게된 데는 루마니아 태생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의 공이 컸다. 차라는 1916년 7월에 출간한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에서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통일을 원하면서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라고 정의했다.
1918년 차라가 작성한 ‘다다 선언문’에는 “다다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떠한 강령도 갖지 않는다는 강령을 갖고 있다”고 해 절대적인 무전제성을 내세웠다. 차라는 ‘다다(DADA)’지를 편집?발행하고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다다’에 입각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1차대전이 끝날 즈음 마드리드, 베를린, 하노버, 쾰른, 뉴욕 등에도 다다 그룹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다다이즘은 다른 주의나 양식들처럼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역적 상황과 개별 예술가들의 기질?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기존의 모든 문명과 문화를 근본부터 회의하고 부정하고 배척

‘취리히 다다’와 함께 가장 유명한 것이 ‘뉴욕 다다’였는데 단초는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쇼가 제공했다. 취리히에서 ‘다다’란 용어가 등장하기 3년 전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뉴욕 다다의 선구자이고 상징적 존재였다. ‘뉴욕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행해졌으나 ‘취리히 다다’처럼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아모리쇼에 출품된 뒤샹의 그림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는 가장 대표적인 다다 양태를 띠었고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17년 4월 10일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전시회에 뒤샹이 남성용 변기 ‘샘’을 출품한 것도 다다의 범주에 포함된 행위였다.
대표적인 뉴욕 다다이스트로는 뒤샹 말고도 프랜시스 피카비아와 만 레이가 있다. 피카비아는 유럽의 다다에까지 참여한 전천후 다다이스트였다. 취리히 다다는 주요 멤버가 취리히를 떠나고 1920년 차라마저 피카비아를 따라 파리로 가면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다다 운동은 일체의 다른 이론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배척하는 모든 이론이 그렇듯 이미 그 자체 내에 붕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을 전복시키는 방법을 열심히 찾던 다다이스트들은 결국 다다이즘 자체를 전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 앙드레 브루통과 동료들은 다다이즘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집중시키려면 어떤 진지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1922년 차라에 의해 조사(弔辭)가 읽혀지고 막을 내린 다다이즘은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이 선언한 초현실주의에 생명을 부여한 뒤 완전히 소멸했다.


■반야월
단장의 미아리고개’삼천포 아가씨’울고 넘는 박달재’등 전국 곳곳에 세워진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노래비가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경남 사천시는 반야월 선생 유족 어문저작권 위탁대리인이 지난 1월 4일 서울중앙지법에 시가 건립한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를 포함해 전국 6곳에 건립된 노래비와 동상이 선생이 작사한 가사와 제목을 무단으로 사용해 어문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1월 22일 밝혔다. <문화일보 2016년 1월 22일>

   
▲ 반야월
반야월(1917~2012)은 우리 가요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노랫말을 짓고 가장 많은 히트곡 가사를 쓰고 가장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한 우리 가요사 그 자체다. 그의 노래를 기념하는 노래비가 전국에 10개 이상 세워진 것만 보더라도 그의 노랫말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본명이 박창오인 반야월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진해농산학교를 중퇴하고 1937년 늦은 봄, 충북 청주에서 양복 일을 배웠다. 재단사 보조로 일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9년 어느 날이었다. 조선일보 김천지국과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하는 ‘전국가요콩쿠르대회’가 경북 김천에서 열린 것이다. 대회는 예선과 결선으로 치러졌는데 결선 진출자는 자유곡과 지정곡 2곡을 불렀다. 반야월은 지정곡 ‘북국 5천km’와 자유곡 ‘춘몽’을 불러 1등을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 가수가 되는 길은 콩쿠르 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게 사실상 유일했다. 1930년대 말 국내 5대 레코드사 전속 가수를 다 합쳐봐야 고작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가수만 되면 최소한의 성공은 보장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태평레코드, OK레코드, 콜롬비아레코드, 빅터레코드, 폴리도르레코드 5개가 있었다. 그중 태평과 OK는 일본인 회사였고 다른 3개사는 미국인 소유였다.
반야월은 1등 입상을 계기로 1939년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전속 계약 후 ‘진방남’을 예명으로 삼고 8곡의 노래를 받았다. 그중 먼저 나온 노래가 1939년 12월 발표된 ‘사막의 애상곡’이다. 진방남은 같은 해 자신이 노랫말을 만들고 이재호가 곡을 붙인 ‘꽃마차’를 불러 작사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꽃마차’를 발표할 때 예명은 평생의 이름이 될 반야월이었다. 우리말로 반달을 뜻하는 반야월은 곧 일그러질 보름달보다 점차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희망이 담겼다. 그는 반야월 말고도 진방남,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옥단춘 등 예명이 다양했다. 작사를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름이 너무 많은 것이 민망스러워 다른 예명들을 하나씩 지어 붙이다 보니 이름 부자가 된 것이다.

반야월이 가사를 쓴 노래 5,000곡 넘어

반야월은 1940년 새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일본의 태평레코드사 본사로 갔다. 노래를 취입하려는데 ‘모친 별세’라는 급전이 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노래를 불렀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으로 시작되는 ‘불효자는 웁니다’는 그렇게 전국에 메아리치며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1941년 12월 초 작곡가 이재호 등과 함께 다시 녹음을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틀 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태평레코드 본사에서 예정되어 있던 녹음을 뒤로 미루고 ‘결전 태평양’, ‘1억 총진군’ 등의 노래를 급조해 반야월에게 취입하도록 했다. 못한다고 하면 탄광으로 끌려갈 게 뻔한 상황에서 반야월은 그들의 지시대로 녹음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2008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친일 인물로 분류되었다. 반야월은 2010년 6월 대국민 사과를 했다.
반야월은 노래와 작사 말고도 재주가 많았다. 해방 후인 1945년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해 부초처럼 유랑했는데 뒷날 톱스타로 성장한 김진규, 이민자, 이예춘 등이 모두 그가 이끌던 유랑극단 단원이었다. 1948년에는 KBS 방송희곡 공모에 ‘허생원전’이 입선되어 극작가로도 등단했다.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에는 그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미아리에 살 때 6?25가 터져 피란을 갔다가 서울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사이 네 살배기 딸이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애처롭게 명줄을 놓은 것이다. 그때의 슬픔을 가사로 쓰고 이재호가 곡을 붙인 노래가 ‘단장의 미아리고개’다.
1957년 가을, 마산국립결핵요양소로 위문 공연을 갔을 때 소복을 입은 채 객석 맨 뒤쪽에서 반야월의 노래를 들으며 흐느끼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반야월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지어 이재호에게 곡을 의뢰했다. 폐병을 앓고 있던 이재호는 동병상련의 심경으로 곡을 만들어 권혜경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이 ‘산장의 여인’이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 붐이 시작되면서 가요 붐도 덩달아 일어났다. 반야월로서는 작사가로서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영화 주제가 작사는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로 시작되는 ‘산유화’(1956)는 가수 남인수가 취입할 때 가사 때문에 한동안 목이 메어 울었다는 가요다. 노래가 발표되자 대중가요를 ‘유행가’라고 얕잡아 보던 클래식 음악가들도 입을 다물었다. 반야월이 가사를 쓴 노래는 5,000곡이 넘는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노래만도 900여 편이나 된다. 대표곡을 열거하면 끝도 없다. ‘울고 넘는 박달재’, ‘무너진 사랑탑’, ‘열아홉 순정’, ‘아빠의 청춘’, ‘소양강 처녀’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친 노래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
‘룰라’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만큼 국민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초등학생 때 학업을 포기하고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빈곤층의 성공 신화였다. 2010년 퇴임을 2주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이례적으로 81%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룰라 신화’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최근 브라질 일간지 폴랴 지 상파울루는 “다음 달부터 방영되는 노동자당(PT) TV 홍보물에서 룰라 전 대통령을 삭제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자당은 룰라 전 대통령이 만든 정당이다. 이 당 대표로 대선에 출마해 2003년 브라질 사상 첫 좌파 정권을 연 사람도 바로 룰라 전 대통령이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당이 당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룰라 전 대통령의 흔적을 없애기로 한 것은 국가적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그가 당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조선일보 2016년 1월 25일>

   
▲ 룰라 전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1945~ )는 2002년 10월 27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유효투표의 61.5%를 얻어 브라질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당선되자 국내외 여론은 급진 좌파에 치우친 정치를 펼칠 것으로 우려했다. 증시는 급락하고 환율은 급등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철수를 서둘렀고 부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룰라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한 후 구두닦이를 하다가 금속공장에 들어갔다. 14살 때는 공장에서 새끼 손가락이 잘리고 26살 때인 1971년에는 병원비가 없어 만삭의 부인을 간염으로 잃었다. 룰라는 1975년 철강노조위원장에 당선되고 1980년 “모든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노동자당(PT) 창립을 주도했다. 창당 후 40여 일간의 대규모 파업을 이끌다 한 달간 투옥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정치투사는 아니었다. 노조활동을 할 때도 허황된 슬로건이나 거창한 정치담론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뿌리를 잊지는 않았다. 거리의 언어로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룰라는 1986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세 차례(1989, 1994, 1998)나 대선에 도전했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 2002년 대선 때는 ‘끼니를 거르지 않는 브라질’ 구호를 내세워 4번째 도전만에 성공했다. 당시 브라질 인구 1억 7600만 명 중 25%나 되는 4400만 명이 절대 빈곤층이었다. 룰라는 2003년 1월 1일 취임 후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외채를 모두 상환하겠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질 사람 중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대선 공약의 재확인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논 상태였다.
취임 후 룰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념보다는 먹고 사는 현실이 중요하다며 실용적 전략을 펼쳤다. 포퓰리즘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우려를 딛고 전임 우파 정부의 시장친화적인 정책들도 계승했다. 노동자당 내 급진 세력의 반시장주의 정책을 과감히 물리치고 ‘룰라노믹스’로 불리는 일련의 시장 친화적 정책을 선택했다.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 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인정했다. 선거 때는 섬유재벌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고 취임 후에는 구 여권 인사를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했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전임 대통령 엔리케 카르도수 정부가 1999년 외환위기 후 시행하고 있는 정책들을 과감하게 계승하고 자유무역 등 시장경제적 기조로 이어져 기업과 외국 자본의 투자환경을 개선하는데 크게 효과가 있었다. 이는 당시 많은 남미 국가에서 새로 집권한 좌파 정부가 포퓰리즘으로 치달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룰라의 전통적 지지층은 “개혁의 배신자”, “회색분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룰라는 흔들림이 없이 추진했다.

좌우를 포용하는 실용적 전략 펼쳐

그는 좌우를 포용하는 실용적 태도를 견지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하기는 했지만 좌파 진영의 핵심 정책들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선 때 공약인 ‘브라질 사람이면 누구나 배를 곪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된다’는 ‘포미 제루(Fome Zero) 즉 ’기아 제로‘ 정책은 그의 이념적 성향에 기반한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빈곤 가정에 현금을 지원하는 ‘보우사 파밀리아’를 추진했다. 사실 이 정책도 전임 우파 정부가 성안한 정책 가운데 하나로 이를 확대·개편한 것이다. 당시 브라질은 빚더미에 앉아 있었으나 룰라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보조금은 빈곤층을 경제 소비자로 떠오르게 하고 결과적으로 서민 경제를 살리고 산업을 일으키는데 일조함으로써 복지의 선순환을 이뤄냈다.
룰라는 대통령궁에서도 수시로 나와 대중과 직접 소통했다. 재임 8년간 670일 가량을 지방에서 보내며 노동자와 빈곤층을 만나 친근하고 직설적 화법으로 그들의 동참을 끌어냈다. 룰라는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 진솔하게 반대파를 설득했다. 15%의 의석을 지닌 노동자당을 이끌고도 12개의 야당과 정책 공조를 통한 연정 대통령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투사보다는 협상가 기질이 강했기 때문이다.
2006년 재선에 성공하자 룰라는 아젠다를 진화시켰다. 서민과 빈곤층에 나눠줄 성장의 파이를 키우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2007년 1차 성장촉진계획(PAC)을 세우고 3년간 2,366억 달러를 투입했다. 집권 마지막해인 2010년에는 PAC에 8,833억 달러나 쏟아부었다. 이런 행보 역시 좌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룰라는 굽히지 않았다. 외교적으로는 다원주의를 구축했다. 베네수엘라의 반미 사회주의자 우고 차베스 대통령, 볼리비아의 좌파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물론 미국 등 선진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2009년 10월에는 2016올림픽을 유치해 떠오르는 브라질의 위상을 세계에 확인시켰다.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 잡는 데 성공

룰라는 2010년 12월 31일 퇴임할 때까지 8년 동안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퇴임시 국민 지지도가 87%에 달할 정도로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재임 8년 동안의 성적표는 경이적이었다. 국내 총생산(GDP)이 2배 이상 증가해 2009년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8위에 올랐다. 외환위기에 몰렸던 1999년 당시 브라질의 외환보유액 170억 달러를 2010년에는 10배가 넘는 3,000억 달러로 키웠다.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와 재정적자도 해결했다. 2000년대 초 연 12%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은 2010년 6% 이하로 안정되었다. 2003년 12.3%에 달했던 실업률은 2010년 6.9%까지 떨어졌다. 1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빈곤층은 2003년 4,400만명에서 2009년 2,900만명으로 감소했다.
이런 호성적을 거두는 데는 운도 따랐다. 집권 후 불어닥친 농산물 및 원자재 가격 급등에 힘입어 2008년까지 연평균 7.5%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했다. 잇따라 터진 대형 유전도 브라질 경제에 큰 행운이었다. 이런 이유로 운이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브라질 코스트’로 알려진 고비용 구조는 여전하고 고임과 높은 세율, 부족한 인프라, 관료 부패 등 브라질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난제들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성장에 주력했던 탓에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실패했다는 평가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높은 범죄율은 브라질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도 세계 경쟁력 순위에서는 결국 하위에 머물도록 했다.
퇴임 후인 2011년 9월 룰라는 ‘레흐 바웬사상’을 수상했다. 그런데도 2011년 11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폴란드의 바웬사처럼 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다”며 “바웬사는 퇴임 당시 지지율이 0.6%에 불과했다”고 털어놓았다. 바웬사는 노조 지도자 출신으로 대통령에 올랐지만 경제실패 등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2010년 룰라의 3대 업적으로 브라질의 세계 8대 경제대국화, 빈곤층 2000만명 이상의 중산층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유치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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