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완서의 글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문장’으로 유명했다. 막힘없이 수려한 문체와 인간의 내면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듯한 관통력, 격동의 현대사를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사로 표현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등단 40주년인 지난해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박완서는 그야말로 우리시대의 작가였다.

▲ 작가 고 박완서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中)
한국문학의 거목이던 소설가 박완서(80)씨가 1월 22일 오전 6시17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치료를 해왔으나 이날 새벽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입원 치료를 받던 중 결국 숨을 거뒀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 문인들과 독자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명쾌하고 수려한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완서 씨를 잃은 큰 슬픔에 빠졌다.

박완서 작가 타계에 각계각층 ‘깊은 애도’
박완서 작가의 타계 소식에 각계각층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박씨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22일에는 김지하 시인, 소설가 박범신, 이승우, 은희경, 김연수, 양귀자, 최일남, 김승옥 씨, 문학평론가 김윤식 씨, 양숙진 현대문학 주간, 이해인 수녀, 가수 김창완 씨 등 여러 문인과 지인들이 한걸음에 빈소로 달려왔다. 이명박 대통령,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이희호 여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등 각계 인사들은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 무엇보다 2년 전 박경리 작가의 타계에 이어 박완서 씨마저 잃게 된 문학계는 큰 상실감에 빠졌다. 소설가 황석영 씨는 “박완서 선생은 등단을 늦게 하셨음에도 전후 한국사의 변화와 중산층의 발생, 한국 근대사의 시민 형성과정을 훌륭하게 그려내셨다”며 “특히, 만년의 문학을 아주 빛나게 마무리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문인들은 트위터 등을 통해서도 추모의 글을 올리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오늘 새벽, 박완서 선생님께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시고,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전했다. 소설가 은희경 씨는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뵈올 수 있었으면…”이라며 “봄이 오면, 영화 보고 맛있는 거 사주신다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강한 분이 앓을 때 얼마나 두려울까 하면서도 오지 말란다고 안 갔던 게 후회되어 눈물 흐른다”고 깊은 슬픔을 드러냈다.

“가난한 문인에게 부의금 받지 마라” 감동 유언
늘 낮은 자세로 소박한 삶을 살았던 故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길이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고인은 생전 “돈 없는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서울 강남구 서울삼섬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 작가의 빈소 앞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유족 측은 “평소 문인들은 돈이 없다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말해 심금을 울렸다. 이날 빈소를 찾은 소설가 박범신씨는 “박완서 선생님은 내게 평생 작가로서 늘 귀감이 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나이나 사회적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강력한 현역 작가로 사셨던 분”이라고 전했다. 염현숙 문학동네 편집국장은 “몸이 불편하시면 심사를 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병석에서도 후보작들을 다 읽으시고 심사평을 남기셨다. 젊은 작가들을 아끼셨던 선생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암에 걸린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투병하다가 홀연히 떠나시면서도 남은 이들을 챙기시는 모습에 고인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생전에서도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정말 감동입니다”, “가는 날까지 후배들을 챙기시네요”, “참 따뜻하신 분” 등 고인의 마음 씀씀이에 존경과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완서에게서 오드리 헵번 모습 발견했다”
고인이 친선대사로 활동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홈페이지와 블로그 등에 ‘박완서 친선대사를 추모합니다’란 제목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했던 박완서 친선대사님,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장문의 추도사를 발표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한국 유니세프 직원들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1993년 소말리아 내전이 극심할 당시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국경 근처의 고마 난민촌에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직접 본 후 “내 눈으로 보았다는 적이 죄다. 이렇게 내 눈으로 보았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해 5월 박씨는 배우 안성기와 함께 최초로 ‘한국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됐으며, 20년 가까이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에티오피아, 몽골,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등지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또한, 고인은 소말리아 난민촌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한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해 큰 반향을 일으키는 등 유니세프 사업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직원들은 이런 모습에 대해 “선생님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이 분이 정말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인가 의문이 들만큼 저희 모두에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셨기에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아주 가까운 지인처럼 느껴지고는 했습니다”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아울러 “불과 몇 개월 전에도 유니세프 후원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까지 오셔서 밝게 웃으시면서 덕담을 해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개발도상국 현지에서 어린이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저희는 말년을 유니세프 봉사활동에 바친 고(故)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발견했고, 작가로서의 명성 못지않게 선생님의 고귀한 이상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친선대사로 함께 활동한 배우 안성기 씨는 추도사에서 “초창기부터 활동을 같이 하던 동지인데 일찍 떠나셔서 정말 슬프다”며 “에티오피아에 함께 갔을 때 앙상한 아이들을 보고 식사조차 하지 못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박완서 선생님은 유니세프에 글로써 또 몸으로도 봉사하신 분”이라고 전했다.

순탄하지 않은 파란만장한 삶
“6·25 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소설이 써지지 않았어요. 나이 마흔에 ‘나목’을 발표하고서야 비로소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31년 개성 외곽 지역인 경기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기 위한 어머니의 집념이었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야 했고, 숙부와 친오빠가 전쟁 중 사망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했다. 당시 천재화가 박수근(1914∼1965)이 초상화부 소속 화가로 PX에서 일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후일 이 시기의 일들을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라고 술회했다. 이 시기의 일들은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은 거기 있었을까’ 등에 투영돼 있다. 전쟁 후인 1953년 직장 동료 호영진 씨와 결혼, 1남4녀를 둔 주부이자 어머니로 살았다. 마흔 살 때인 1970년 ‘나목’이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불혹의 늦은 등단이었으나 40년간 문학이 담아낸 그녀의 세계는 실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1988년 남편을 암으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잇달아 떠나보낸다. ‘대화’라는 산문집은 남편을 부르며 “나 좀 데려가 달라”며 울부짖던 그녀가 다시 삶의 의욕을 되살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노년의 박완서씨는 ‘부숭이의 땅힘’,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등의 동화집을 쓰며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아이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시대의 아픔, 수려한 문체로 어루만지다
김수이 문학평론가는 “박완서의 소설은 오래 고통을 삭인 사람의 명치끝에서 터져나오는 신음이며 비명이다. 이 신음 또한 비명은 서늘한 아픔과 함께 놀랍게도 가슴 뻐근할 정도의 진한 충족감을 안겨준다”고 평했다. 박완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비극의 역사를 실향(失鄕)의 한(恨)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체험으로 쉼 없이 되새김질하면서도 사랑과 용서, 화해의 서사로 승화한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었다. 그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과 가족을 잃고 학업마저 중단했던 아픔을 극복하고 피워낸 작품들로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써왔다. 6·25전쟁 체험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 ‘엄마의 말뚝’ 연작과 ‘그 남자의 집’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여성의 체험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큰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의 작품에서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청년’ 등에서 그녀는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중산층의 속물화된 일상과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을 신랄한 문체로 꼬집었다. 내면적인 서사보다는 선이 굵고 분명한 이야기를 살아있는 문장으로 그려 많은 독자와 공감을 나눈 박완서는 여성의 억압 문제를 다루고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의 아픔을 그린 여성문학의 대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완서는 평단뿐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고른 지지를 받았던 행복한 작가였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00만부가 넘게 팔렸으며, 77세의 고령에 발표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30만부나 나가며 그녀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작가임을 입증했다. 이 외에도 소설집 ‘꽃을 찾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따뜻한 당신’과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여자네 집’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여럿 있다. 노년에 이른 뒤에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등단 40년을 맞아 자신의 작가인생을 돌이켜 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내며 고령에도 창작활동에 매진했다. 고인은 이 책에서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며 죽음을 초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