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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예술혼 세계에 전파한다
‘빛의 예술가’ 강정완 화백
2011년 01월 02일 (일) 23:02:48 황인상 전문기자 his@newsmaker.or.kr

예술은 소중하다. 한 권의 인문학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통찰을, 한 부의 신문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을, 하루라는 삶의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지혜를,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 강정완 화백은 국전 대통령상, 파리 위마니떼르드 프랑스대상전 은상, 몬테카를로 국제현대미술대전 모나코 국왕상 등을 휩쓸며 미술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2010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수훈, 대한민국 미술인상 특별상 중 명예공로상을 서세옥 선생님, 장리석 선생님과 함께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며 미술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개념은 좁은 의미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 곧 20세기 후반기의 미술을 일컫는다. 하지만 그 개념은 실제로 매우 막연해 무엇을 두고 현대미술이라 칭하느냐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구분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난 젊음이든 고통으로 절규하든 엽기적 발산이든 정치적 저항이든 간에 이미 현대미술은 개인의 감성을 넘어 시대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다
세계적으로 ‘빛의 예술가’ ‘색의 마술사’라 일컬어지는 강정완 화백이 주목을 받고 있다.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예술가의 길로 접어든지 50여 년이 넘었다. 1933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한 그는 경남도의 대표적 교육기관인 진주사범학교를 1953년 졸업하고 그해 3월 당시의 국민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강정완 화백은 “내가 미술의 세계에 빠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일본인이었는데 그분이 내게 주는 필생의 메시지가 있었다”라면서 “어린 나이에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시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70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사랑으로 지도해주신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며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라고 회상하는 강 화백.

“강정완의 작품 제목은 그림의 명제라기보다는 시의 구절이다. 그림과 시가 분리되지 않는 세계를 지향하려는 작가의 독특한 미학의 산물이며 비록 그가 구사하고 있는 매재는 서양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정신은 동양의 경지로서의 심의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미술평론가 오광수

은사의 훈도에 힘입어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 교사로 봉직했던 당시에도 그는 아동 심리를 이용한 교육 미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외국 서적을 통해 발 빠르게 새로운 이론과 경험을 습득했다. 그 덕분에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국내외 미술대회에서 최고 상을 휩쓸었다. 이렇듯 교육 미술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강 화백은 국제아동미술대전의 최우수 지도상 40여회와 미술교육 공로상 15여회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작가로서의 꿈을 접지 못했던 그는 해마다 국전에 도전, 수차례 낙선 입선 및 특선을 해오다 1973년 국회의장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22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이듬해인 1976년 정부의 국비유학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1981년까지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현대 회화를 수학했다.
   

독자적 화풍으로 빛을 발하다
그는 “프랑스 파리 유학은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1975년 국전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도불의 장도에 올랐다”고 하면서 “나라에서 지원금을 받고 갔지만 한 달에 300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액수였다. 덕분에 아내와 자식들까지 이국에서 부양해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1년 6개월 동안 Paris 관광지와 초상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가 그렸던 초상화 작품은 그곳을 여행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인기 절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입소문이 퍼지게 되어 일감은 끊이지 않았고 덕분에 파리 유학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강정완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채감이 특징이다. 기법 면에서도 가히 독창적인 그의 화풍은 간단한 덧칠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가 화석처럼 새겨진 기록의 캔버스를 만들어 낸다.

프랑스 현지 유학을 하는 동안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한국미술작가 세계화시대에 앞장서 한국 청년작가들이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후원 및 메세나 역할에 노력을 해왔다. 특히 혼신의 열정으로 제작해 온 작품이 1978년 몬테카를로 국제현대미술대상전 대상인 모나코국왕 Ranier3세상을 수상하면서 한국미술의 저력을 국제화단에 보였던 그는 1981-1982년에는 파리시국제미술전의 초대작가로 선정 국제적인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이로 인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아뜨리에를 기증받는 등 프랑스 작가 협회 회화분과위원으로 추대되어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다. 강 화백은 “지난 1978년 세계 98개국 5천여 명의 화가들이 참가한 몬테카를로 국제현대예술전에서 대상인 모나코국왕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화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후 파리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그동안 아내와 자식 넷을 거느리느라 생활고초가 말이 아니었지만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강 화백, 전 세계의 주목을 받다
프랑스화단에서 주목받는 유력 인사로 알려지면서 강정완 화백의 작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강 화백은 프랑스 정부가 제공해주는 화실도 얻었고 10년씩 시민권이 인정되는 특혜도 받으면서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얻었다. 그러한 환경덕분에 꾸준히 개인전을 열면서 놀랄 만큼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평론가들은 그에 대해 “색에 관한 한 색채화가 샤갈과 피카소, 마티스의 그것과도 비견될 만큼 강정완 화풍의 색채감은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세계가 인정하는 화가가 되면서 지난 1989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이 엘리제궁으로 초대했고, 1991년 작크쉬락 파리 시장이 그를 초청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강정완의 화려한 색채는 환상적인 부동 내지는 부의 형상미와 그 표현기법에 따라 생동감 내지 생명감이 대작 화면에 온통 충만하는 매우 특이하고 세련된 형상으로 실현되어 있다.

올해로 79세, 예술가로서는 성년기의 정점에 올라서게 된 강정완 화백. 그의 나이만큼이나 그가 창조하는 작품들 역시 이제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있다. 자연에 순응한 대상으로서의 절대성인 아카데미즘 회화양식을 추구해 민족성, 향토성과 함께 지역문화의 맥을 그려왔던 초기를 거쳐 추상적인 톤의 심상풍경들이 환상적 여운으로 가득하며 색상의 파격적인 표출과 성스러운 우주에로의 심호흡이 서로 교차하는 작품 속에서 강 화백은 모더니즘의 유혹에서 벗어나 한국 고유의 전통의 정수를 잊지 않고 파리에서 얻어진 이국적인 것들과 접목시킨 화법을 추구했다. 강 화백은 작품을 통해 동서양의 초서체 기법을 통해 상징성과 실재성과의 관계, 기호와의 기교, 영웅적인 제스츄얼리즘 등 공허한 여백으로 끝나기 쉬운 몸부림에서 탈피하려고 무단히 노력한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위하여
국제 교류를 통해 한국 미술계의 위상을 드높이고 한국 빛깔의 신비를 세계에 소개해 온 강정완 화백은 국전 대통령상, 파리 위마니떼르드 프랑스대상전 은상, 몬테카를로 국제현대미술대전 모나코 국왕상 등을 휩쓸며 미술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2010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수훈, 대한민국 미술인상 특별상 중 명예공로상을 서세옥 선생님, 장리석 선생님과 함께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며 미술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20년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강 화백은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강 화백은 지난 2003년에야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정착했다. 2004년 성남시가 세계문화도시구축을 위해 성남문화재단을 창립하는데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지방문화, 세계화에 대처하는 다양한 문화 인프라 구축에 기여해왔다. 지역문화발전을 위해 그의 작품 대작 2점을 성남문화재단에 기증했으며 성남문화재단 후원회를 결성하는데 그 중심에서 기업후원을 유치하는 등 성남아트센터 공연 문화와 미술전시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난 지금 열네 살이다. 육십갑자로 인생의 커다란 원을 한 바퀴를 돌았으니, 이제야 제대로 한 번 뭔가를 시작해 볼 나이가 된 것이다. 회화란 무엇이며, 창작이란 무엇인지를 이제 겨우 조금 알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완성이란 것은 없다. ‘내겐 언제 붓을 놓을 것이냐’만이 남아 있을 뿐,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나는 그림이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 강정완 화백

강정완 화백은 한국 미술은 물론, 탄천문화포럼 100인회 운영위원회 고문, 성남지역 남송국제아트페어 초대 조직위원장, 성남시문화상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미술활성화 방안의 기반 조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소외된 지역을 찾아가는 미술프로그램 운영 제의, 선-후배 전시에 찾아 격려하기를 실천하는 등 남다른 봉사정신으로 성남 문화 대중화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2009년에는 제11회 ‘중국인민정부 문화부가 주최하는 세계 50개국 공연예술축제’에 한국현대미술 전 운영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위촉되어 페스티벌기간 한국이 주빈국가로 선정된 공식행사에서 ‘2009오늘의 한국현대미술-한국의 빛깔전’을 유치해 한국 미술을 세계 속에 정착시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강 화백은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한국현대미술이 중국 상하이에 확산되는 비전과 소통을 도모하며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 행사기간 내내 국내의 언론 및 중국 언론에 매 시간 보도되면서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사)한국미술협회 상임고문, 성남미술협회 상임고문, (사)세계미술연맹 상임고문, (재)성남문화재단 운영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정완 화백은 “지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방도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힘을 쏟을 것”이라면서 끝으로 후배들에게 “화가는 절대 겸손해야 하며 침묵으로 작품제작에만 몰두해야 한다. 창작이란 할수록 어렵다. 살과 뼈를 깎아야만 하는 멀고도 험한 길이 창작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의 말씀을 남겼다.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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