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 말아서 가지고 다니는 TV와 지갑에 들어가는 PC,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디스플레이 등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할 법한 기술들이 현실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국내 연구진이 원자 한 겹 두께의 초소형 고성능 포스포린을 발견해 더 작고 빠른 전자소자 개발이 앞당겨질 전망이다.

황인상 기자 his@

국내 연구진이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의 단점을 극복 할 수 있는 차세대 반도체 물질을 찾아냈다. 지난 8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저차원전자계연구단의 지원을 받는 포스텍(포항공대) 물리학과 김근수 교수 연구팀은 연세대 최형준, 이연진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2차원 반도체소자의 핵심 원천기술?밴드갭 조작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 권위의 과학저널 ‘사이언스’ 8월 14자일에 게재됐으며, 국제 특허 출원을 준비 중이다. 김근수 교수는 “그래핀 상용화의 고질적 문제점인 밴드갭을 해결하고, 그래핀의 장점만을 취한 것으로 2차원 반도체 물질 연구의 중심이 그래핀에서 포스포린으로 이동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포린, 그래핀에 버금가면서 단점 극복

▲ 김근수 교수

그래핀은 최고의 열전도성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보다 2배 이상 열전도성이 높고, 강철의 200배 강도, 구리의 100배 전도성을 지닌 데다 투명하고 탄성까지 뛰어나 투명 디스플레이부터 고효율 태양전지까지 활용 분야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구부릴 수 있는 디스플레이나 손목에 차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어 미래의 신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핵심소재로 주목받는 그래핀은 한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한국은 그래핀에 대한 10여년 이상의 연구투자를 거쳐 세계 1~2위를 다투는 최고수준의 기술력과 휴대폰,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충분한 수요기반을 확보했다. 그래핀을 반도체로 이용하려면 물질 안에서 전자가 쉽게 흐르지 않도록 이동을 가로막는 에너지 장벽에 해당하는 “밴드갭”이 필요하다. 밴드갭은 물질의 고유한 물리량으로 밴드갭 값이 0에 가까울수록 전류가 쉽게 흘러 도체가 되며 유한한 높은 값을 갖으면 전류가 쉽게 흐르지 못해 부도체가 된다. 적당한 밴드갭 값을 갖으면 전류가 흐름을 쉽게 제어할 수 있으므로 반도체가 되어 전기 신호를 만들 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핀에 이런 밴드갭이 없기 때문에 이 물질의 장점을 실제 소자에 활용할 수 없었다.

포스텍 물리학과 김근수 교수 연구팀과 연세대 물리학과 최형준·이연진 교수 연구팀은 두께가 0.5㎚(나노미터·10억분의 1m)인 막 형태의 포스포린에 칼륨을 증착하면 인위적으로 반도체처럼 밴드갭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포스포린은 인(P) 원자로 된 흑린의 표면 몇 개 층을 떼어낸 2차원 평면구조의 나노 물질로, 머리카락 굵기 10만분의 1 수준인 0.5나노미터 두께의 얇은 막이다. 그래핀과 유사하게 육각벌집 모양의 원자 배열을 갖으나 규칙적으로 주름이 잡혀있어 외부 스트레인이나 전계 효과로 물성 조작이 비교적 쉽다. 연구진은 포스포린의 표면에 칼륨원자를 흡착시켜 수직방향으로 전기장을 만들면 포스포린의 전자배치에 영향을 미쳐 밴드갭에 폭넓은 변화(밴드갭 값: 0 ~ 0.6 전자볼트)를 주는 데 성공했다. 이는 밴드갭이 없는 포스포린의 밴드갭을 폭넓은 범위에서 선택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류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고성능 반도체 후보물질 실용화 길
김근수 교수는 “그래핀 상용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밴드갭을 만들고자하는 접근법과 반대로 생각했다. 포스포린과 같은 이미 밴드갭을 갖고 있는 2차원 반도체로부터 출발해 밴드갭을 조작하여 그래핀과 유사한 우수한 물성을 인가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며 이번 연구를 시작한 계기를 밝혔다. 공동연구팀은 포스포린의 밴드갭이 0이 될 때는 그래핀처럼 준도체적 상태가 되면서 전도성이 그래핀과 비슷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에 원자 한 겹 두께의 고성능, 초소형 반도체 소자를 개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원리는 일반적인 2차원 반도체 물질에 응용할 수 있다. 발광다이오드(LED)나 컴퓨터 칩 등을 만드는 전자소자나 전기신호를 이용해 빛을 만드는 광전소자 등에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근수 교수는 “그래핀의 놀라운 물성 중 하나가 전하이동도, 즉 전도성이 굉장히 높아 기존 반도체보다 수십∼수백 배 우수하다는 점이다. 포스포린에서도 유사한 물성이 나타나므로 고속소자로 활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앞으로 실제 포스포린 트랜지스터를 제작하고, 공기 중 포스포린의 산화를 방지하는 기술개발 등 추가 연구를 통해 실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는 “실용화까지 2차원 반도체의 상업성 타진 및 몇 가지 남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수 년 정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미래를 앞당겨 열 수 있는 키가 되는 신소재. 다행히도 우리나라 신소재 연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이번 연구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의 지원으로 수행됐다. 김 교수는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특성을 가진 신소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재 이 분야는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하다. 선도적 위치를 고수할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연구하여 2차원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초소형 전자소자 상용화를 이루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