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밀러 탄생 100주년

아서 밀러(1915~2005)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1915년 10월 17일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올해 10월이면 탄생 100주년이다. 밀러는 10대 중반까지는 의류 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 덕에 중산층의 생활을 했으나 16살 때 닥친 대공황(1929)으로 집안이 곤두박질쳤다. 밀러는 몰락하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세일즈맨들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34년 9월 미시간대에 입학했다.

밀러는 자신의 희곡이 대학 문학상에 뽑힌 것에 고무되어 희곡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대학 졸업 후 밀러가 쓴 희곡들은 브로드웨이에서 모두 퇴짜를 맞았다. 다행히 6번째 작품 ‘억세게 운 좋은 남자’가 1944년 브로드웨이 극장에 올려지긴 했으나 불과 4회 만에 막을 내려 밀러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밀러는 또다시 도전했다. 그 결과 7번째 작품 ‘모두가 나의 아들’이 당시 최고 연출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엘리아 카잔의 연출로 1947년 1월 브로드웨이에 올려졌다. 이번에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해 10대 희곡에 선정되고 생애 처음으로 토니상과 뉴욕 연극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해 12월까지 모두 328회 공연된 ‘모두가 나의 아들’ 성공 덕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수입도 좋아졌다.
밀러는 다음 작품으로 청소년기에 목격한 세일즈맨의 비참한 생활상을 소재로 희곡을 썼다. 평범한 영업사원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모습을 고발한 희곡은 1948년 8월 ‘그의 머릿속 내부’라는 제목으로 카잔에게 보내젔다. 카잔이 제목을 바꿔 연출한 ‘세일즈맨의 죽음’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모로스코 극장 무대에 올려진 것은 1949년 2월 10일이었다.
주인공 윌슨 로먼(Lowman=low man)은 이름이 암시하듯 사회조직의 말단에서 평생 일만 하다 비참하게 늙어가는 소시민이다. 평생 동안 세일즈맨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다가 대공황으로 해고되자 창업자 2세인 젊은 사장에게 항변한다. “이 회사에 34년을 봉직했는데 지금은 보험료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해고가 확정되자 로먼은 그동안 다퉈온 아들과 화해한 뒤, 어느 날 밤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주기 위해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자살을 선택한다. 연극은 장례식 날 아내가 “집의 할부금도 다 갚고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 정작 이 집에 살 사람이 없다”며 울부짖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현대사회의 비정한 생리를 날카롭게 해부

비평가들은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고발” “세계 연극의 금자탑”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관객은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에 눈물을 흘렸다. 당시 미국의 최대 백화점 체인의 회장인 버나드 김벌은 이 연극을 관람하고 감동한 나머지 바로 그날 밤, 자기 회사는 더는 노령을 이유로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밀러는 2년 동안 무려 742회나 공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의 성공 덕에 브로드웨이 사상 처음으로 3대 메이저상인 퓰리처 연극상, 뉴욕 연극비평가협회상, 토니상의 베스트 작가상 등 주요 상을 휩쓸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매카시즘의 잣대를 들이대는 비평가들은 “감상주의와 멜로드라마, 마르크시스트적 선전물”이라며 비판했다.
무엇보다 그를 아프게 한 것은 절친한 동료이면서 ‘세일즈맨…’을 연출한 엘리아 카잔의 밀고였다. 카잔이 1952년 미 하원의 비미활동위원회 청문회에 불려가 권력과 할리우드 영화 자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930년대에 공산당 활동을 했던 8명의 동료 이름을 댄 것이다. 밀러는 카잔이 동료들을 팔아넘긴 것에 분노했다.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으로 달려가 17세기 그곳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광기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크루서블(시련)’을 완성해 1953년 1월 22일 무대에 올렸다. ‘크루서블’은 밀러에게 1953년 토니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밀러는 미 정부에 의해 195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막된 ‘크루서블’ 공연 참가를 저지당하고 1956년 비미활동위원회 청문회에 불려가 공산당원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는 추궁에 시달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밀러는 1930년대 공산당에 입당했던 약점이 있었으나 의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의회 모독죄로 기소되어 벌금과 30일간의 구류 선고를 받고 블랙리스트 등재와 함께 여권 말소 처분을 받았다.
청문회 기간 중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밀러가 아니라 그의 곁을 지킨 할리우드 최고 인기 배우 마릴린 먼로였다. 빨갱이 사냥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시대를 역류하는 밀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먼로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먼로는 밀러를 선택했고 밀러의 재판비용을 댔다. 1956년 6월 20일에 이뤄진 두 사람의 결혼은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위대한 육체의 결합”이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밀러는 회고록에서 1951년 1월 먼로와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악수를 나눴을 때 먼로의 몸이 움직이는 충격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미국의 위대한 두뇌와 위대한 육체의 결합

▲ 아서 밀러

먼로에게 밀러는 그때까지 할리우드에서 만난 사람 중에 자신을 여배우로 진지하게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먼로는 밀러를 만난 이후 지적 욕망에 눈을 떴다.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에 등록해 문학 강좌도 들었다. 먼로는 밀러와 5년간 살면서 두 번 유산을 했다.
밀러는 먼로를 위해 영화 시나리오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썼다. 그러나 두 사람은 먼로,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 등이 출연한 영화 촬영을 끝내고 1961년 2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밀러는 1962년 2월 사진작가와 결혼했으나 아버지 같은 든든한 보호막을 잃어버린 먼로의 정신 질환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먼로는 1962년 8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먼로의 자살 후 밀러는 먼로와의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한 ‘몰락 이후’(1964)를 발표해 죽음을 애도했다.
밀러는 매카시즘이 잠잠해지자 국제펜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며 옛 소련과 동유럽권 작가들을 위해 투쟁하고, 베트남전 반전운동에도 정력적으로 나서는 등 행동하는 지성인의 면모를 보였다. 2005년 2월 10일 그가 90세로 세상과 작별했을 때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2월 11일 오후 8시에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것으로 그를 추모했다.
이처럼 생전에는 현대사회의 비정한 생리를 날카롭게 해부하며 당대의 사회문제를 전면에 부각해 “미국의 양심” “위대한 극작가”라는 평을 들었던 밀러였으나 사후에는 떳떳지 않은 개인사가 밝혀지기도 했다. 다운증후군에 걸린 채 1966년에 태어난 아들을 출생한 지 며칠 만에 양육기관에 보내 자신의 일생에서 지워버리고 평생 만나기를 거부한 것은 물론 자서전에서조차 아들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사후에 드러난 것이다.

■호머 헐버트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처음으로 서양식 음계로 채보해 세계에 알린 미국인 호머 B. 헐버트 박사가 ‘제1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단법인 서울아리랑페스티벌조직위원회(위원장 윤영달)는 “129년 전 한국에 온 헐버트가 우리 소리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아리랑 가락을 서양식 음계로 채보해 우리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런 점이 이 상의 제정 취지에 잘 맞아 첫 수상자로 합의 추대했다”고 9월 15일 밝혔다.  <연합뉴스 2015년 9월 15일>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여느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다.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유니온신학대를 2년간 수료한 뒤 길모어, 벙커와 함께 1886년 7월 4일 약관 23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다. 세 사람의 조선행은 고종이 한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하면서 주한 미국 공사 푸트에게 미국인 교사 3명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육영공원은 양반집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1886년 9월 23일 35명으로 개교해 영어와 각국의 역사와 정치 등을 가르쳤다. 육영공원 출신 중에는 을사조약 체결 6개월 전인 1905년 5월 영국에서 자결한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과 친일매국노 이완용이 있다.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한글을 배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한글에 매료되었다. 2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고 한글을 깨우친 그는 1888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한 후 부인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헐버트는 생활이 안정되자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였다. 헐버트는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등이 망라된 ‘사민필지’를 다시 대중용으로 손질해 1891년 2000부를 인쇄했다. 하지만 5년 간의 육영공원 교사 고용계약이 끝나 1891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헐버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영국인 올링거 부부가 조선에서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한국 소식)’ 창간호(1892.1) 첫 장에 ‘한국의 알파벳’이라는 제목의 9쪽짜리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 간편성 등을 영문으로 소개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여러 국제 학술지와 미국 신문, 잡지 등에도 한글이 매우 과학적인 문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글을 썼다. 그러다가 감리교 선교출판회사인 ‘트라이링규얼 출판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1893년 10월 1일 신식 인쇄기를 갖고 다시 방한했다. 이후 감리교에서 세운 삼문출판사의 대표를 맡아 이 인쇄기로 양서와 잡지들을 출간했다.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

다시 돌아온 헐버트를 누구보다 반긴 사람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육영공원 시절부터 한국어에 능통하고 조선에 대한 이해가 깊은 헐버트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헐버트는 1895년 10월 을미사변 때 왕비를 잃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고종의 주변을 선교사 애비슨, 언더우드와 함께 교대로 지키며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헐버트는 1년 동안 발행하다가 휴간에 들어간 ‘한국 소식’지를 1895년 1월 아펜젤러 등과 함께 속간하고 1899년 4월 통권 59호로 폐간될 때까지 발행했다.

▲ 호머 헐버트

1897년 헐버트는 한성사범학교 운영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헐버트는 교육과 언론과 저술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헐버트가 특히 큰 관심을 쏟은 것은 한글교과서 편찬이었다. 육영공원 시절 ‘사민필지’를 냈던 경험을 살려 헐버트교과서 시리즈를 펴냈다. 그중 첫 번째인 ‘초학지지’는 60여 페이지의 분량에 세계지도, 조선지도 등을 컬러로 인쇄한 당시로서는 초호화판 교과서였다.
헐버트는 교육자이면서 언론인이었다. 미국에서 의사자격증을 따고 귀국한 서재필과 친하게 지내며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을 도왔다. 영문판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사실상의 편집인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1901년 1월 월간 영문잡지 ‘코리아 리뷰(한국 평론)’를 창간해 편집과 인쇄, 경영을 맡았다. 영문으로 발행된 50페이지의 이 잡지는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게재하고 전 세계 19개국에 배포함으로써 조선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타임지 특파원(1898년)과 AP통신 특파원(1903~1905년)으로도 활약하면서 조선의 실상을 외국으로 전달하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특히 조선의 역사 저술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사에 대한 자신의 연구성과를 1901년~1904년 ‘코리아 리뷰(한국 평론)’에 4년 동안 시리즈로 연재하고 1905년 영어로 된 최초의 역사서 ‘한국사’를 출판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할 때 헐버트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종의 밀사 역할이었다. 헐버트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905년 10월 15일 서울을 출발해 11월 17일 워싱턴에 도착했으나 공교롭게도 조선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와중이었다. 미 국무성과 백악관이 고종의 친서를 거부하자 헐버트는 1906년 6월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동안 ‘코리아 리뷰’에 연재된 것과 ‘한국사‘를 요약한 것 등을 합해 1906년 6월 ’대한제국 멸망사’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를 출판했다.
‘대한제국 멸망사’는 우리나라의 문화, 전통, 풍습 등에 대한 모든 것을 영문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책으로 외국인들이 조선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조선의 문화 보존에도 관심이 많았다. 1896년 구전으로만 불려오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해 ‘한국 소식’ 2호에 서양음계를 붙인 아리랑 악보를 실었다. 1907년 경천사 10층석탑을 일본이 약탈해간 것에 대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신랄하게 비난함으로써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조선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1907년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별개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했다. 헐버트는 1907년 5월 가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월 헤이그 현지에 도착했다. 러시아 외무장관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7월 10일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과 조선의 국권회복에 대해 연설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져지고 고종이 퇴위하면서 그는 조선에 오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그는 신문기고, 강연, 회의참석 등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미 상원 외교위에 나가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한국은 그를 잊지 않고 초대했다. 헐버트는 당시 그를 초대한 측에 보낸 답장에 “과거 일본이 몰수해간 고종의 내탕금 예치와 관련된 증서와 서류를 가지고 한국에 가겠다”고 썼다. 헐버트는 조선을 떠난지 40년만인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86세의 노인에게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 가량의 여행은 무리였다. 결국 장거리 여행으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8월 5일 눈을 감았다. 장례는 8월 11일 외국인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서울 마포 한강변 양화진 외인묘지 한쪽, 1897년 서울에서 6세의 어린 나이로 숨진 아들의 묘역 옆에 묻혔다.
그의 죽음과 함께 미국 대사관이 미국 시민의 재산을 보호한다며 헐버트가 가지고 온 가방 3개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가방 속에 들어있을 내탕금 관련 비밀도 함께 미궁에 빠졌다. 당시 묘비명에는 ‘선견자요 조선의 친우인’ 뒤에 공백으로 남겨두고 마지막에 그의 유언인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조선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새겨졌다. 그 빈틈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헐버트 박사의 무덤’이라는 친필을 새겨넣기로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999년에야 김대중 대통령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휘호를 새겨넣었다. 1950년 3월 1일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지난 9월 16일 열린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2차 TV 토론회에서 그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았음에도 토론 주자들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인물은 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포천에 따르면, 경선 주자들은 3시간가량 진행된 토론회에서 레이건을 45회나 언급했다.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로, 참가자들의 잠재적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언급 횟수(26회)보다 훨씬 많았다.<조선일보 2015년 9월 19일>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보수의 시대’였다. 시대의 문을 연 것은 1979년 영국의 총리로 취임한 마거릿 대처(1925~2013)였지만 실질적으로 시대를 이끈 건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1911~2004) 미국 대통령이었다. 두 지도자의 뒤를 이어 헬무트 콜(1982.10)과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11)까지 각각 독일과 일본의 총리로 취임함으로써 미테랑의 프랑스를 제외한 세계의 주요 강대국에서 보수화의 물결이 넘쳐났다.
보수 시대의 맏형 격인 레이건은 미국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레카대를 졸업하고 1932년 라디오방송국의 스포츠 아나운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37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후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사실상 B급 배우를 전전했다.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연기자로서가 아니라 1947년 영화배우조합장으로 선출되고부터였다.
레이건은 젊어서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비대해진 민주당 정권이 자유주의를 무시하고 사기업의 영역에까지 침투한다는 생각이 들자 40대 후반인 1960년 대선 때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다. 1962년 당적을 공화당으로 바꾸고 1964년 대선 때는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그가 정치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된 1966년이었다. 1970년 재선에 성공하고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 것에 고무되어 1976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으나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 패했다. 포드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레이건은 보수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1980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유권자들은 지난 4년 동안 ‘도덕정치’를 표방해온 카터의 지도력 부재에 실망, ‘강한 미국’을 주창하는 레이건을 지지했다. 그 결과 1980년 11월 4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은 미 역사상 최고령인 6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레이건은 취임 당일인 1981년 1월 20일 운이 좋게도 444일 동안 이란에 억류 중이던 52명의 인질이 석방되는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취임 69일 만인 1981년 3월 30일 정신이상자 청년이 쏜 총에 맞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미 경제 호황 이끈 ‘레이거노믹스’ 추진

오늘날 미국인들은 냉전 종식의 기틀을 마련하고 ‘레이거노믹스’라는 경제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회생시킨 것을 레이건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가시적인 성과보다도 비관주의가 팽배하던 미국에 자신감을 심어준 것을 더 큰 공적으로 꼽는다. 레이건이 취임할 당시 국내적으로는 베트남전 패배의 기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카터 행정부의 이란인질 석방작전 실패로 지극히 침체된 분위기였다. 레이건은 ‘위대한 대화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국민을 상대로 호소하고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또한 휘청대거나 유약한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강력한 리더십으로 각종 정책을 밀고 나가 국내외 정책을 변화시켰다.

▲ 로널드 레이건

레이건은 집권하자마자 군사비를 연간 20% 이상씩 늘리는 등 군사력 증강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미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곳에는 군사행동도 불사했다. 상대가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정권이라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를 가리지 않고 군사적으로 간섭했다.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군을 지원하고 그라나다를 침공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레이건은 1983년 3월 8일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면서 ‘스타 워즈(별들의 전쟁)’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 정책을 구체화했다. 미국이 우주에 배치한 위성을 이용해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및 핵미사일을 비행단계에서 격추한다는 ‘스타 워즈’ 계획을 두고 레이건의 반대파들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한다"며 레이건을 '레이 건(Ray Gun)'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미국의 과학기술로는 완벽한 핵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레이건은 SDI 정책을 밀어붙였다. 소련은 미국에 맞서 장거리 미사일 등 군비 강화에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국민의 생활은 궁핍해져 국력만 소진되었다.
레이건은 유럽에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핵무기 감축에 합의하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레이건은 1985년 11월의 첫 만남을 비롯 고르바초프와 모두 5차례 정상회담을 열었다. 1987년 12월 8일 두 정상은 유럽과 아시아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군비 경쟁 해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레이건은 미 역사상 가장 급격한 군비증강을 이룩한 대통령인 동시에 가장 빨리 군비 축소를 달성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

레이건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훈이 타당하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현직 시절 시작된 레이건의 ‘공산주의 타도’ 운동은 1989년 1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10개월 만에 독일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물론 소련의 붕괴는 레이건의 힘을 통한 평화 추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고르바초프라는 인물이 역사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세금 감면, 정부 지출 감소,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촉진해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강력히 추진했다. 취임 초기에는 기록적인 실업률과 은행?농장의 파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3년부터 인플레이션이 꺾이고 고용이 늘어나면서 미국은 2차대전 후 최고의 팽창기를 맞았다. 특히 세금 감면 정책은 기업가정신을 부추겨 정보기술 혁명의 토대를 마련하고 개인의 저축과 기업의 투자를 유도해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레이거노믹스의 그늘도 컸다. 2000억 달러의 재정적자와 부유층 감세정책으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등을 유산으로 남긴 것은 대표적인 부작용이었다. 의료, 교육, 환경 등 복지예산도 큰 폭으로 삭감되어 저소득층의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세금 감면으로 인해 정부 부채는 취임 첫해인 1980년 9100억 달러에서 1989년 퇴임 때는 2조6000억 달러로 3배나 증가했다. 이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부채의 시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공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1989년 1월 백악관을 떠난 레이건에게 후한 점수를 매겼다. 퇴임 때의 지지율(63%)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66%)에 못지않았다. 이런 인기 덕에 레이건은 같은 공화당 출신의 후임자에게 백악관을 넘겨준 60년 만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