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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패션쇼 떠난 ‘백의 천사’ 앙드레김
멋과 사랑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
2010년 08월 31일 (화) 16:33:55 신세영 기자 ssy@

특유의 한국어·영어 혼용체와 말투 등으로 성대모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독특하게 디자인한 풍성한 화이트 의상과 완벽하게 메이크업한 얼굴, 그리고 머리는 검정 칠로 배색을 아우르고 늘 온화한 표정과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던 남자. 남들에게는 화려하고 유별난 유명인으로 비쳤지만, 손자 손녀 사랑이 극진한 할아버지였고, 도우미 아주머니에게도 존대하며 가족처럼 대하는 다정다감한 분. 나이를 초월한 신선한 감각과 창의력으로 그에겐 특별히 노년이 없는 것만 같았던 앙드레 김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한국 패션계의 거장 앙드레김(본명 김봉남)이 지난 8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75세. 앙드레김은 12일 오후7시 25분께 서울 연건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대장암과 폐렴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지난 7월말 폐렴 증세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온 앙드레김은 결국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故 앙드레김의 영결식은 유족, 지인, 연예계 관계자들 등 200여명의 애도 속에 15일 오전 5시 40분께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어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스님들의 독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운구차량은 생전 흰색을 사랑했던 고인의 뜻을 이어 국화와 백합으로 꾸며진 흰색 차량으로 준비됐으며, 아들 김중도씨와 부인이 세 자녀와 함께 시신의 뒤를 따랐다. 시신은 고인이 30년 넘게 살았던 압구정동 자택과 고인이 생전 패션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강남구 신사동의 아뜰리에, 그리고 지난해 완공된 경기도 기흥의 앙드레 김 아뜰리에까지 고인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들을 거쳐 천안공원묘원에 안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연예·스포츠·정재계 끊임없는 추모 행렬
디자이너 앙드레김의 빈소에는 패션계 뿐 아니라 연예, 스포츠, 정재계 등 각계의 조문이 끊이지 않아 패션계를 넘어선 고인의 폭넓은 행보를 가늠케 했다. 평소 자신의 패션쇼 피날레 무대를 연예인에게 맡기는 등 이들에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였던 고인에 대한 연예계의 슬픔은 남달랐다. 제일 먼저 빈소에 도착한 원빈을 비롯해 이병헌, 소지섭, 송승헌 류시원, 최지우, 김희선, 송혜교, 고현정, 김혜수, 전도연, 김태희, 최불암, 유승호, 강신성일, 엄앵란, 강수연, 한채영, 임권택 감독 등 방송·가요·영화계를 막론한 수많은 연예계 인사들이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스포츠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홍명보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 역도선수 장미란, 프로골퍼 신지애, 전 농구선수 우지원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재계에서는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 유족들을 찾아 조문했으며, 박희태 국회의장은 8월 14일 고인의 빈소를 찾아 “패션계의 국보를 잃어 슬프다”라고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직접 빈소를 찾아 이명막 대통령을 대신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도 했으며,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장관과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빈소를 찾아 고인이 문화계에 남긴 업적을 기렸다. 군(軍)의 조문도 이어졌다. 김형철 공군소장 등 공군 관계자 20명이 빈소를 찾았다. 이중 공군 조종사 14명은 지난 2008년 앙드레김이 손수 디자인한 ‘빨간 마후라’를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고인이 몸담았던 패션계에서는 도신우 모델센터 회장과 이상봉, 장광효 등 유명 디자이너들이 조문해 선배 디자이너에게 애도를 표했다.

故 앙드레김, 48년 디자이너의 삶

   
1935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현재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서 태어난 앙드레김은 신도초등학교와 한영고등학교를 졸업, 1962년에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같은 해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앙드레 김 의상실)를 열어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디자이너가 되었다. 남성 디자이너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과 노력으로 의상 디자인계를 개척한 그는 1966년 파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다. 이후 그는 이집트 카이로, 캄보디아 왕국 앙코르와트 패션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 세계 곳곳에서 패션쇼를 열며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그는 1982년 생후 5개월 된 남자아이를 입양했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의 아들은 ‘앙드레김 아뜨리에’의 한 디자이너와 결혼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1960년대 영화 배우 엄앵란 등의 옷을 만들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앙드레김은 1980년에 미스유니버스 대회의 주디자이너로 뽑혔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수복을 디자인 하였다. 앙드레김의 디자인은 여성 패션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냉장고, 침구, 속옷, 도자기 등 일생생활에서 쓰이는 다양한 제품들을 출시해 또 다른 미적 감각을 뽐냈다. 2006년에는 서울에서 ‘문화재 환수 기금 마련을 위한 패션쇼’를 열어 해외 유출 문화재의 반환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은 편이며, 일부에서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그럼에도 앙드레김은 상복이 많은 디자이너였다. 1997년 문화훈장 화관장을 추서 받았고, 2000년 프랑스 예술문학훈장을 받은 데 이어 2008년에는 문화훈장 보관장으로 훈위가 승급됐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상들을 수상하며 한국 대표 디자이너로서의 위상을 과시해왔다.

불우 아동들의 꿈과 사랑을 준 ‘고마운 아저씨’
앙드레김은 한국의 원로로서의 모범적인 행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60년대 이후 근대화시대의 그늘진 곳에 사랑을 베풀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온 몸으로 실천한, 특히 불우 아동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고마운 아저씨’였다. 우리나라 살림 형편이 변변치 못하던 1960년대 시절 앙드레김은 의상 발표회 수익금을 YWCA 건립기금으로 내놓는가 하면, 파월장병에게 김치보내기, 일선장병 위문 등 국가안보 상황에도 그 나름의 관심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그의 패션쇼는 자선을 위한 무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70년의 무대는 특히 영친왕 이은(李垠) 씨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와의 인연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방자 여사는 정박아들을 지도하는 자행회(慈行會)와 농아와 소아마비 아동에게 편물, 수예, 공예 등 기술을 가르쳐 자활을 돕는 명휘원(明暉院) 두 자선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앙드레 김은 자선 패션쇼를 열어 이 불우 아동들을 위한 복지사업기금을 보탰고, 방한복, 점퍼, 티셔츠, 재킷 등 손수 디자인한 실용복들을 가지고 가 그들에게 입혀 주기도 했다. 또한, 자서울시립아동병원의 불우 아동들을 위한 패션쇼와 정박아들을 위한 만찬회를 개최하는 등 어려운 아동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는 유니셰프 친선 패션쇼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할 뿐 아니라, 해외 유출 문화재 기금 패션쇼, 국제 백신기구 기금 마련 패션쇼 등 수백 차례에 걸친 자선패션쇼를 열어 선행을 펼쳐왔다. 그런가하면 2005년에는 부자들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모범 납세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는 등 국익에 기여하고 지조 있는 문화예술인으로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떡볶이를 좋아한 그의 소박한 일상

   
앙드레김은 각종 시상식의 단골 심사위원, 시상자로 자주 등장하고 주요 문화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편이다. 하지만 그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답게 공식석상에서는 늘 메이크업과 트레이드마크인 순백의 의상을 갖춰 입은 앙드레 김의 모습 외에 그의 일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앙드레김이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사진 한 장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앙드레김은 분식집 사진이 화제가 된 후 인터뷰를 통해 “싸고, 맛있고, 빨리 나와서 좋아 한다”며 “어린 학생들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앙드레김의 일상은 일의 연속이다. 앙드레김은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항상 오전 5시 30분 기상해 19가지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지식과 교양은 평생을 지켜온 이 같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됐다.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는 건강한 생활습관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앙드레김은 어떤 누구의 부탁이라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들어주며, 사진을 함께 찍어줄 때는 자연스러운 포즈까지 취해주는 센스를 겸비했다. 그리고 앙드레김의 일상은 일의 연속이다. 앙드레김은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항상 오전 5시 30분 기상해 19가지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으며,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다. 오전 9시에는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일과를 정리하고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을 맞고 직접 지인들의 경조사를 챙기기도 한다. 낮 시간에는 작품 활동 및 패션쇼 준비, 비즈니스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각종 공연 및 문화행사에 참석해 시간을 보낸다. 특히, 디자이너답게 앙드레 김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벌의 의상을 갈아입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앙드레김 주식회사 생긴다
그동안 개인 회사로 운영돼온 앙드레김 의상실이 조만간 주식회사로 바뀐다. 대표이사는 고인의 양아들 김중도 씨(30)가 맡는다. 앙드레김 유족 측은 8월 22일 “개인 회사로 운영해온 앙드레김의상실을 지난달 ‘앙드레 김 디자인 아뜰리에’라는 주식회사로 설립했다”고 밝혔다.

   

또한, 앙드레김 없이도 의상실 운영은 지속될 전망이다. 앙드레김을 곁에서 30여 년간 수행해온 임세우 실장은 “10년 넘게 앙드레김 선생님 곁에서 디자인을 해온 8명의 디자이너가 한동안 의상실을 이끌어갈 것”이라며 “올 11월 하순이나 12월 초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함께 앙드레 김 선생님의 추모 패션쇼를 열 계획”이라고 전했다. 연간 매출이 1000억 원대에 달하는 앙드레김브랜드의 라이선스 사업도 계속된다. 현재 ‘앙드레김’을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브랜드는 도자기(한국도자기), 주얼리(파에톤), 골프웨어(K&J), 안경(반도광학), 속옷(아인스M&M), 침장(SHL네트웍스), 양말(빈센치오), 우산(성창 FNG) 등 8개다. 여기에 추진 중이던 구두, 핸드백, 와이셔츠 등을 포함하면 10여 개 이상. 대부분 3년에서 7년 정도로 계약했으며, 1~3년 정도 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다. 대부분 업체는 앙드레김 사후 추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열정적이고 성실했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나오면서 계약 만료 이후에도 사업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는 분위기다. 내년 7월 계약이 완료되는 앙드레김 골프웨어를 전개하는 K&J는 6개월 앞당겨 올해 말에 재계약하자는 의사를 유족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도자기는 앙드레김이라는 타이틀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다. 2008년 앙드레김 이름을 붙인 도자기를 처음 선보였는데, 지금RK지 양산한 제품만 접시 등 20종을 넘는다. 하지만 그의 타계로 지난 3월 출시한 웨딩컬렉션 ‘패럿’이 마지막 작품이 됐다. 앙드레김 도자기는 2년 반 동안 50억원 안팎 매출액을 올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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