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통신 ‘천리안’ 39년 만에 역사 속으로

1990년대 국내 PC통신 서비스를 이끌었던 ‘천리안’이 오는 10월 31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천리안은 1986년 한국데이타통신(LG데이콤 전신)의 ‘비디오텍스’ 서비스로 출발했다. 1989년부터는 제공 정보의 종류를 확대했다. 이후 1992년 본격적인 PC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며 하이텔·나우누리·유니텔 등과 함께 국내 PC통신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네이버와 다음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등장하며 이용자가 급감했다. 결국 하이텔과 나누우리는 각각 2007년과 2012년 서비스를 중단했다. 천리안이 10월 말 서비스를 종료하면 3대 PC통신 모두 명맥이 끊긴다.

199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이 배어 있는 곳

인터넷이 모든 걸 지배하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1990년대 10여 년간 활발했던 PC통신은 차라리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PC통신은 199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과 꿈과 사랑이 배어 있는 곳이다. 비록 화려했던 전성기는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저물었으나 PC통신이야말로 아날로그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넘어가는 숨 가쁜 과도기를 일반인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한 완충지대였다.
PC통신은 PC(혹은 단말기), 모뎀, 전화선(혹은 랜), 접속 프로그램(에뮬레이터)만 갖추면 누구나 가능했다. 또한 PC통신의 천리안과 하이텔에 접속만 하면 누구나 PC통신의 상징과도 같은 파란 화면에서 ‘GO' 명령어 하나만으로 채팅방, 토론방, 동호회 등 다양한 사이버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전자우편(이메일)이 가능했고 신문기사도 전날 저녁에 볼 수 있었으며 실시간으로 증권 시세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주제별 PC통신 동호회에는 각 분야의 고수들이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자랑했고, 그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H.O.T.’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을 때는 소녀 팬들이 이곳에서 팬클럽 활동을 벌였으며 하이텔의 ‘메탈동(메탈음악 동호회)’을 통해서는 수많은 인디밴드가 탄생했다. 국가대표 축구 응원전을 주도하는 ‘붉은 악마’ 역시 PC통신에서 몸을 풀었다. 하이텔의 컴퓨터 동호회 ‘다솜’은 컴퓨터 용어 한글화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고, 하이텔 하드웨어 운영체제 동아리 'OSC'는 전자제품 평가와 ‘공동구매’라는 문화를 탄생시켰다. PC통신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도 있었다. 네트워크와 시티즌의 합성어 ‘네티즌’도 PC통신의 산물이었으며 ‘반갑습니다’와 ‘당연하다’의 줄임인 ‘방가’와 ‘당근’도 PC통신에서 사용하던 신조어였다.
신문명을 접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정액제의 하이텔은 월 1만 원이면 족했으나 종량제의 천리안은 자칫 방심했다간 월 수십만 원이 청구되는 경우도 있어 조심해야 했다. 돈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버는 사람도 있는 법. 발 빠른 사업가는 ‘쥬라기공원’ 게임으로 월 5,000만 원, 증시 정보로 월 3,500만 원을 벌어들였다.
뭐니 뭐니 해도 PC통신이 낳은 최고 스타는 소설 ‘퇴마록’을 하이텔에 연재한 이우혁이었다. 그는 1994년 1월 퇴마록 첫 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시작해 2001년 7월 마지막 19권을 완간함으로써 1,000만 부나 팔려나가는 초대박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와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역시 PC통신 ‘나우누리’에서 인기를 끌던 소설을 영화화해 각각 490만 명, 52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영화 ‘접속’은 PC통신의 채팅을 소재로 해 1997년 관객 동원 1위를 기록했다.

▲ ‘천리안’과 같은 구조의 ‘하이텔’ 초기 화면

아날로그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넘어가는 완충 역할

PC통신의 원조는 1980년대 각기 다른 목적으로 출발한 전자게시판(BBS)과 비디오텍스였다. 이들의 기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PC통신이 탄생했다. 전자게시판은 PC를 이용해 가입자 간에 파일과 편지를 주고받거나 채팅을 통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도록 만들어졌다. 비디오텍스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문자 정보나 영상 정보를 이용자가 단말기 화면을 통해 직접 보면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홈쇼핑과 홈뱅킹까지 할 수 있었던 정보통신의 총아였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비디오텍스는 1986년 9월 2일 데이콤의 ‘천리안’이 개통되고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이 전자신문, 증권 정보, 기업 정보, 외환 정보 등을 서비스하는 ‘한경 프레스텔’ 을 개통하면서 막을 열었다. ‘한경 프레스텔’은 1987년 4월 명칭을 '한경 케텔(KETEL)'로 바꿔 1988년 9월 10일 일반인을 상대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비디오텍스 사업에 뛰어든 한국통신은 1991년 5월 ‘하이텔’을 브랜드명으로 정하고 그해 12월 한경의 ‘케텔’을 인수해 한국PC통신을 설립했다. 한국PC통신은 1992년 3월 ‘케텔’을 ‘코텔’로 변경하고 5월 유료화를 시작했으며 7월 ‘코텔’을 ‘하이텔’로 통합해 ‘천리안’과 함께 PC통신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1986년 9월 천리안 비디오텍스 서비스를 시작한 데이콤은 1987년 4월 한글 사서함 유료 서비스를 시작하고 1988년 5월 문자 정보 서비스 ‘천리안 2’를 개통해 영역을 넓혔다. 뒤이어 1990년 1월 PC통신 서비스 목적의 PC-Serve를 개통하고, 1992년 12월 천리안 2와 PC-Serve를 통합해 ‘천리안’을 탄생시켰다. 이런 점에서 1992년은 비로소 PC통신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해였다.
두 회사의 치열한 경쟁 덕에 회원 수가 급증하자 1994년 나우콤의 ‘나우누리’가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고 대기업도 호시탐탐 문어발을 뻗쳤다. 1996년 유니텔(삼성)과 아미넷(현대), 1997년 넷츠고(SK), 1998년 채널아이(LG)가 잇달아 PC통신업에 진출해 당시 5대 재벌 가운데 4대 그룹이 PC통신 시장에 뛰어드는 과열 현상을 보였다. 대기업은 막강한 자금력과 저렴한 이용료를 무기로 인터넷과 병행하는 서비스 전략을 구사했으나 PC통신도 인터넷 포털도 아닌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해 실적이 좋지는 않았다.
반면 천리안과 하이텔의 유료 회원 수는 1998년 각각 135만 명, 103만 명을 돌파하며 대기업을 멀찌감치 따돌리는 여유를 보였다. 1위 업체 천리안은 1998년 1,045억 원의 매출에 100억 원 규모의 흑자를 기록했다. PC통신의 정점은 전체 회원 가입자 수가 350만 명까지 늘어난 1998년이었다.
문제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세상이 빠르게 재편되는데도 PC통신업체들이 여전히 미래를 낙관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유료 회원을 수익 기반으로 한 자신들과 달리 포털의 무료 서비스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포털이 빠르게 영역을 확대하자 술렁이는 빛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포털로 전환하자니 마땅한 수익 모델이 없고 포털을 외면하자니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미 포털 시장은 야후, 다음, 네이버 등이 선점하고 있었다.
결국 LG의 ‘채널아이’는 2000년 1월 LG가 데이콤을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천리안에 흡수되고, SK텔레콤의 ‘넷츠고’는 ‘라이코스’와 합병해 문을 닫은 뒤 2002년 3월 ‘네이트’로 새롭게 진용을 짰다. 하이텔은 한미르(포털)와 합쳐 막을 내리고 2004년 7월 17일 파란닷컴으로 오픈했다. 천리안은 PC통신의 비중을 줄이고 ‘철닷컴’을 강화했으나 이미 실기한 뒤여서 비주류 포털로 전락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PC통신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선명하고 파랗던 PC통신 화면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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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게이트 혹은 박동선 사건

미국 연방검찰이 미 국적의 한국계이면서 한반도 안보 문제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한국 정부를 불법적으로 대리한 혐의로 최근 기소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의 전직 고위인사는 “과거 정보기관은 ‘코리아 게이트’로 불리는 박동선 사건(1976년) 이후 미국에서 비정상적인 로비는 자제했다”며 “국정원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코리아 게이트는 1976년부터 3~4년간 한·미 간 갈등을 빚게 했던 대표적인 외교 스캔들이다. 

한미관계, 1970년대 들어 균열 생겨

해방 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한미관계는 다소의 우여곡절과 갈등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협조와 우호의 친밀 관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고 균열이 생겼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독재 정치에 실망하고 미 언론은 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1969년 닉슨독트린 후 오히려 지상군을 철수한 것에 불만이 많았다. 
박정희 정부는 이런 양국 갈등과 미국 언론의 비판 여론 때문에 미국이 대한(對韓) 방위공약을 혹여라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미 의회를 상대로 한 로비공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폭발한 게 한미관계를 벼랑까지 몰고 간 ‘코리아 게이트’ 이른바 ‘박동선 사건’이었고 사건의 불씨가 된 것은 미국산 쌀이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박동선이 미국 쌀 수입 대리권을 따낸 것은 1967년이었다. 당시 쌀을 생산하는 주를 지역구로 둔 미 의원들에게 쌀은 흉년이 나도 걱정 풍년이 나도 걱정인 골칫거리였다. 안정적인 쌀 수출 루트를 확보한다는 것은 그들 의원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박동선을 통해서만 쌀을 수입하도록 독점권을 보장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쌀 독점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의 일부로 미국이 한국 정부를 지지하게끔 로비활동 자금에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한미관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코리아 게이트의 시발이었다.
박동선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의 쌀장수들로부터 950만 달러의 커미션을 받았다. 이중 얼마가 미 의원들에게 건네졌는지는 박동선 본인만 안다. 다만 박동선이 1978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인정했듯이 수입 가운데 85만 달러가 32명의 전·현직 의원들에게 건네진 것은 분명하다.
박동선 사건은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지 기사를 통해 집중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FBI가 박동선과 한국계 공작원이 미 의원 20명 이상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조사 중”(10월 15일), “한국 정부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10월 24일)이라고 상세히 보도했다.
이 보도가 있기 1년 전부터 워싱턴 포스트는 박동선에 대해 수차례 보도함으로써 박동선을 감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1975년 3월 17일 자에서는 조지타운 클럽을 무대로 한 박동선의 사교활동을 큼직한 사진과 함께 소개했고, 7월 27일 자에서는 ‘박동선은 수수께끼의 한국인’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그럼에도 당시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박동선은 보도를 묵살했고 이후 1년 동안은 언론도 비교적 잠잠했다.
그러나 그 1년은 한국 정부와 박동선의 유착 관계를 찾아내기 위한 미국의 준비 시간이었다. CIA, FBI, 법무성도 박동선의 뒤를 캤지만 주한 미 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대사와 정치 담당 참사관도 적극적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여기자 맥신 체셔는 끈질긴 추적 기사로 한국 정부와 박동선을 압박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년 후 보도된 “박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중앙정보부 등이 90여 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뿌렀다”(1976년 10월 24일)는 내용의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미 정보기관의 수사가 이미 상당 부분 진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었다. 실제로 박동선은 보도가 있기 전인 1976년 9월 미 법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 조사가 있기 전인 10월 6일 미국에서 영국으로 출국했다. 법무부와의 교감을 거친 출국이었으나 세상은 도피로 이해했다.

한국 정부, ‘청와대 도청’한 미 정부 향해 되레 큰소리쳐

▲ 박동선이 1978년 2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에게 자신의 심경과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가 관련 기사를 연속적으로 터뜨리자 뉴욕타임스를 비롯 다른 언론사들도 뒤질세라 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은 정부의 보도 통제로 한동안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 신문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내에서 장기집권하고 있는 박정희 정권이 밖으로까지 손을 내밀어 미국에 부도덕한 손길을 뻗쳤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일부 행정부 관리와 의원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워싱턴 포스트의 첫 보도가 있고 11일이 지나서야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관계없는 일이며 박동선이 개인사업을 위해 벌인 로비”라고 발표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에서만은 미국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그것은 도청이었다. 근거는 1976년 10월 27일 자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한국 정부는 1971년부터 5년 동안 꾸준히 로비를 벌여왔으며 증거는 미 CIA가 청와대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보도 내용이었다. 도청 보도는 두 가지 점에서 미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한국 정부의 로비 사실을 증명하려면 도청 자료를 근거로 내세워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미국의 주권 침해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점이 첫 번째였고, 미 법원이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도청 자료만으로는 박동선의 뇌물 제공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결국 박동선의 직접 증언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만 확인된 채 도청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11월 24일 예기치 않은 일이 또다시 터져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김상근 중앙정보부 요원이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김상근이 FBI에 망명 선물로 제보한 것은 이른바 ‘백설 작전’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대미 매수공작 계획이었다. 박동선의 로비활동이 말썽 나자 그를 후퇴시키고 그 대신 김한조라는 재미 사업가를 통해 의회, 언론계, 행정부를 상대로 공작활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김한조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제약회사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화장품 회사를 설립하는 등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다. 
이런저런 의혹이 불거지자 1977년 2월, 미 의회가 한미관계 조사권을 위임한 ‘프레이저 소위’를 구성했다. 프레이저 소위는 4년 전인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 37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20여 차례 청문회를 열었다. 핵심은 김형욱과 김상근의 증언이었다.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의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했다. 특히 김형욱은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소위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해 통일교와 김대중 납치 사건 등 유신 정부의 약점을 헤집으며 박 정권의 비밀들을 낱낱이 쏟아냈다. “박동선도 내가 정보부장 때 부린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미 언론은 유신정부의 약점을 헤집는 김형욱의 증언을 토대로 박정희 정권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웠다. 김상근의 입에서는 “1974년 9월부터 1975년 6월 사이에 재미 사업가 김한조에게 한 번에 30만 달러씩 두 번에 걸쳐 6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증언이 흘러나왔다. 
미국의 주요 관심은 누가 얼마의 뇌물을 받았느냐로 쏠렸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박동선의 증언이 필수적이었다. 1977년 9월 미 의회가 박동선은 뇌물 제공과 선거자금 불법 제공 등 36가지 혐의로, 김한조는 위증과 매수 음모 2가지 혐의로 기소하면서 한국에 머물고 있는 박동선의 소환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한동안 박동선의 소환을 거부하다가 1978년 2월 면책특권을 조건으로 박동선을 미 의회 윤리위 증인으로 내세우기로 미 의회와 합의했다.

엄청날 것 같던 박동선 사건, 싱겁게 끝나

박동선은 1978년 2월 26일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2월 28일부터 비공개로 진행된 미 하원 윤리위 증인석에 앉았다. 박동선을 몰아세울 상대는 특별검사 출신의 리언 재워스키 변호사였다. 닉슨 대통령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나게 했던 그의 그물에 걸리면 누구라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1978년 2월 28일 시작된 미 하원 윤리위 비밀 증언에서 재워스키는 박동선이 한국 정부의 기관요원이고 미 의원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자백하도록 온갖 질문을 퍼부었다. 위원들도 중죄인을 다루듯 비수를 들이댔다. 그러나 박동선은 노련한 화술, 적절한 기지, 순발력있는 재치로 위원들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다만 32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85만 달러 상당의 선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자격으로 준 것이지 한국 정부의 로비 목적으로 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월 9일 40시간의 비밀 증언이 다 끝났을 때 박동선은 측근에게 “그들 조사관이 나를 맷돌 속에 집어넣고 빙글빙글 돌려댔다. 자칫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1978년 3월 14일 박동선은 상원 윤리위 증언대에도 섰다. 닷새 동안의 증언에서 의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박동선의 로비 사실이 아니라 그의 폭넓은 지인 관계였다. 한 상원의원이 “귀하와 가까운 전·현직 상원의원 이름을 대보라”고 했을 때 박동선이 답한 의원 수만 해도 줄잡아 20명이 넘었다. 또 다른 의원이 “그들 중 가족적인 친교를 맺고 있는 의원은 몇 명이냐”고 물었을 때 박동선 입에서 나온 의원 이름은 7~8명이나 되었다. 4월 3일부터 이틀간 진행된 공개 증언에서 박동선은 위기에 몰리긴 했으나 또다시 특유의 기지와 익살로 위기를 모면했다. 
미국의 언론, 의회, FBI에 의한 2년에 걸친 조사와 장장 60시간에 걸친 증언은 결국 이렇다 할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박동선은 면책특권을 인정받아 무죄가 되었다. 반면 김한조는 1978년 5월, ‘징역 3년형에 6개월 복역 후 3년간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2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1979년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반 동안 미 연방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조사를 받은 미 의원들 가운데 1명의 전직 하원의원만 실형 선고를 받았을 뿐 기소된 의원은 없었다. 1978년 10월 13일 하원 윤리위는 3명의 의원에게 ‘견책‘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내린 뒤 활동을 마감했다. 상원 윤리위는 10월 16일 보고서를 채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프레이저 소위는 11월 한미관계를 정리한 450쪽의 최종보고서를 발표해 “박동선 문제와 관련, 어떤 의원도 징계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법적·공식적으로는 1979년 8월 16일 워싱턴의 연방지법이 박동선에 대한 36개 항목에 걸친 기소를 기각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엄청날 것 같던 박동선 사건이 이처럼 싱겁게 끝난 것은 1차적으로 박동선의 뛰어난 증언 능력 때문이지만 “가급적 안보 분야는 훼손하지 않는 게 좋다”는 양국의 공감대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박동선 사건은 한미 관계사에서 양국 정부를 가장 많이 또 오랫동안 괴롭힌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미국의 언론이 연일 맹폭을 가하고 의회가 분노하고 행정부가 비판했으니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미 언론의 무책임한 반한 무드 조성 때문에 재미교포들은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혈맹관계면서도 서로 상대방을 잘 몰라 갑작스럽게 퉁겨져 나온 ‘코리아 게이트’ 후 한미관계는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한국이 1950~60년대처럼 호락호락하게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한국은 미 의회의 무리한 압력과 미 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실망, 미국의 존재 의미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박동선은 ‘코리아 게이트’ 후 워싱턴 로비계에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로비 대상자를 철저히 보호하고 전방위에 걸친 그의 로비 범위와 능력이 만천하에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박동선은 타고난 로비스트

박동선은 1935년 평북 순천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배재중학을 졸업한 후 1952년 17세 때 도미했다. 시애틀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956년 조지타운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훤칠한 체구에 미소 띤 얼굴, 거기에 사근사근 속삭이는 나직한 말씨와 몸에 밴 서구풍의 매너를 갖춘 박동선에게 조지타운대 입학은 도랑에서 놀던 물고기가 넓은 호수를 만난 격이었다. 박동선은 ‘천부적인 사교가’답게 대학 1학년 때 학년의 리더 격인 대의원에 뽑히고 3학년 때 이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출신의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박동선은 여세를 몰아 워싱턴 지역 한국학생회장과 전국유학생연합회장도 차지했다. 
1962년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박동선이 주목한 것은 파티 문화였다. 워싱턴에서 파티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였고 정치였다. 박동선은 파티 클럽을 창설하기 위해 워싱턴 DC 조지타운에 200년 전 세워진 2층 목조건물을 20만 달러에 구입할 때 자금을 투자하고 실무 운영을 맡았다. 건물의 겉모양은 청교도적인 서구풍으로 단장을 하고 내부는 왕궁의 거실을 방불케 하는 호화스러운 가구들로 꾸몄으며 한국의 골동품과 그림들로 장식했다. 
한번 만나면 몇 개월 몇 년 후에도 반드시 기억해 내는 박동선의 비상한 기억력과 수완 덕에 조지타운 클럽은 날로 번창했다. 박동선이 매년 네 번 여는 대만찬회는 워싱턴 사교계의 화제거리였다. 박동선은 사교클럽을 운영하면서 미국과 미국인의 생리에 대해 더욱 큰 자신감을 얻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