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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4년 05월 16일 (목) 13:10:0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플라자 합의’…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시작, 우리는 사상 첫 무역 흑자 경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11월 대선에서 재집권하면 미국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제2 플라자 합의’ 추진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무역흑자가 많은 한국이 제2 플라자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985년 ‘플라자 합의’가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고 일본과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차이를 알아본다.

美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 앓아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제2차 오일 쇼크가 세계 경제를 강타했을 때 미국은 고금리 정책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달러 가치가 높아져 1980년대 초·중반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해졌다. 미국 제조업의 아성이었던 자동차·반도체 및 전자제품 분야에서도 전세가 일본으로 완전히 역전되었다. 1984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5% 안팎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이 적자에 허덕일수록 일본과 서독은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챙겼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재정적자까지 늪에 빠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합친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를 앓았다.
일본은 일방적인 대미 무역 흑자가 미국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수출 자율규제’라는 방식으로 대기업들의 미국 수출 속도를 조절하도록 권고했다. 그런데도 미국 상품은 일본에서 팔리지 않고 일본 상품만 미국에서 선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과 서독을 ‘쌍둥이 적자’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G5(선진 5개국)에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 22일 미국·독일·프랑스·일본·영국 등 G5(선진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미국의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개선을 위해 일본의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달러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데 합의했다. 환율이 의도한 대로 떨어지지 않을 경우 선진 5개국 정부가 ‘협조 개입’을 통해 시장을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Plaza Accord)’였다. 
일본과 독일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해온 터라 ‘플라자 합의’에 따른 미국의 환율절상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특히 일본으로서는 미국이 방위조약을 통해 일본의 국방비 부담을 상당 부분 떠 안고 있는 상황이라 반대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플라자 합의 결과, 합의 직전 달러당 240엔대이던 환율은 1년 남짓 후 150엔대로 절상되었다. 1987년 말에는 다시 그 절반 수준인 달러당 121엔까지 폭등했다. 서독 마르크화도 달러당 2.85마르크대에서 1987년 말에는 달러당 1.57마르크대로 45% 정도 절상되었다.

▲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G5 재무장관 회의.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3세,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장관.

日 저금리로 부동산 폭등했다가 폭락

이처럼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엔화 절상)했는데도 일본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품의 달러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수출품의 달러 가격은 같은데 달러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으니 일본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 중앙은행은 고통받는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취했다. 5%이던 정책금리는 1년 반 만에 2.5%로 떨어졌다. 은행들이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저금리로 마구 돈을 풀면서 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로 몰렸다.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촉발한 버블(거품) 경제가 시작한 것이다. 50년짜리 ‘초장기 론’, 2세대에 걸쳐 대출금을 갚아도 되는 ‘2세대 론’이 등장하면서 도쿄, 오사카, 삿포로, 나고야 등의 대도시와 그 인근 지역의 지가 상승률이 200~900%에 달할 정도로 치솟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엔화 절상 압력을 줄이기 위해 해외 부동산·금융상품 투자를 적극 장려하자 기업들은 채산성 향상을 위해 생산기지를 저개발국으로 이전하고 미국의 록펠러센터, 유니버설 영화사 등 해외 기업과 부동산을 마구 사들였다. 부동산 버블이 정점에 달한 1991년, 도쿄의 땅값만으로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고 할 만큼 일본의 땅값이 폭등했다. 개인의 해외 소비도 크게 증가해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깃발부대’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주식시장도 들썩여 1989년 주식 버블 피라미드가 최정점에 달했을 때 닛케이지수는 3만 8915를 기록했다. 버블이 시작된 1986년 닛케이 평균주가는 1만 3000대였으나 1987년 일거에 2만대로 뛰고 1988년 다시 3만대로 점프한 뒤 1989년 최고가인 3만 8915를 찍은 것이다. 1986년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NTT)의 주식민영화를 통해 상장 공모를 했는데 1주 29만7000엔에 발행된 것이 2개월 만에 10배 이상 상승, 318만엔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러자 수익이 폭증한 금융회사에서는 말단 사원들에게도 무제한 택시 쿠폰(출퇴근 및 외근 시 사용)을 주거나, 사내 팀별 골프대회 우승자에게는 최고급 외제차를 주기까지 했다. “긴자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개도 1만엔짜리 지폐를 몇 장씩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 소리도 빠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엔화 절상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 개선 효과가 보이지 않자 일본 정부에 적극적인 적자재정을 요구했다. 환율 조정만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 일본의 내수를 팽창시켜 대미 수입을 늘리라는 압력도 가했다. 마침 일본 정부 역시 기업의 채산성 악화와 버블 붕괴에 대처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증가시킬 생각이었다. 그 결과 1990년 GDP(국내총생산)의 37%에 불과하던 일본의 정부 부채가 급증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고령화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 지출은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빼곤 주로 노인의료보험 등 고령화에 대비한 사회보장 지출에 집중되었다. 정치적으로 자민당의 일당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군소정당 간 정권투쟁이 격화하면서 국민의 표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 남발된 것도 정부 부채가 급증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에서 버블이 한창일 때는 고용이 늘어나는 등 체감경기가 너무 좋아 아무도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 3월 일본 대장성이 은행에 부동산 관련 융자 금지 지침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초저금리로 융자를 해주던 은행이 대출의 고삐를 세게 쥐면서 돈이 돌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금리 인상으로 거품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다면 일본 경제가 다시 활성화될 것이라고 오판했다. 하지만 급격한 금리 인상(15개월 동안 2.5%에서 6.0%로 5차례 인상)과 부동산 관련 대출 억제를 위한 총량규제 정책 등의 긴축금융 정책은 예상을 뛰어넘는 자산가격의 폭락을 불러왔다. 6대 도시의 지가지수(상업지 기준)는 1990년 502.9로 정점을 찍은 후 2005년 67.3을 기록할 때까지 15년 연속 하락했다. 이렇게 실물경제의 성장을 동반하지 않은 투기경제의 거품이 한번 꺼지기 시작하자 일본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결과는 1990년대 초부터 계속된 ‘헤이세이(平成) 장기 불황’이었다. 더불어 호황기에 일본 경제의 장래를 낙관했던 기업들의 과잉 설비투자는 공급과잉 문제를 유발했고 이는 디플레이션 초기 증상으로 나타났다. 부동산의 가격 하락이 시작되자 융자금을 갚지 못한 기업과 개인이 파산이 이어졌다. 융자금 회수를 못한 은행들은 파산의 길을 걸었고 은행들의 연쇄도산은 다시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상 첫 국제무역수지 흑자

1985년 9월 G5(선진 5개국)가 합의한 이른바 ‘플라자 합의’의 당초 목적은 급증하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예상치 않은 영향을 미쳐 한국은 미국 못지않은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플라자 합의는 우리나라에서 달러 가치, 국제금리, 유가를 동시에 떨어뜨리는 ‘3저 시대’를 낳았고 그 덕에 한국은 국제무역수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첫 흑자를 기록했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엔화 가치는 급등하고 미국의 프라임레이트(우량기업우대금리)는 1985년 9.5%에서 1986년 7.5%까지 인하되었다.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석유 수요 감소로 1985년 말 배럴당 28달러이던 유가는 1986년 배럴당 13.8달러로 급락했다. 원유가 하락, 국제금리 인하, 달러화 약세(엔화 강세)가 몰고 온 ‘3저 현상’은 외채 망국론에 시달리고 석유를 전량 수입해온 우리 경제에 엄청난 행운을 불러왔다. 3저 현상 덕에 우리나라는 1986년 한 해 동안 국제수지에서 총 46억 5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무역수지에서 42억 5000만 달러, 해외교포 송금증가로 인한 이전수지에서 10억 3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무역외수지에서는 6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흑자의 원인과 액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원유 수입 부담이 20억 5000만 달러 감소하고, 국제저금리에 의한 외채이자 부담이 4억 3000만 달러 경감되었으며,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 호조로 30억 6000만 달러의 국제경쟁력 향상 효과를 보았다. 흑자 덕에 총외채 규모도 1985년 말 468억 달러에서 1986년 말에는 44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국제무역수지가 아닌 단순한 국제수지 흑자는 과거에도 있었다. 1960년대의 월남 특수와 1970년대의 중동 지역 건설 호황 등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의 흑자는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 증가로 무역외수지가 일시적으로 흑자 상태를 보인 것일 뿐 순수 무역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수지에서 대규모의 흑자를 기록한 1986년은 대한민국 역사의 주요 분기점으로 기록될 만한 특별한 해였다. 
국제수지 개선 내용이 비교적 충실했다는 점에서도 흑자 기조 정착에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수출이 크게 호조를 보인 것은 엔화 강세 덕에 우리 상품의 수출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강화된 결과지만 자동차, VTR 등과 같은 신종 수출 유망 품목이 많이 개발된 것도 수출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3저 호황’은 수출이 늘어날수록 대일무역 역조 현상을 더욱 심화하는 기형적 수출구조를 드러내 우리 산업의 구조적인 취약점을 노출했다. 대미 무역 흑자 폭이 커진 것도 장차 역풍을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 
흑자시대는 4년 간 계속되었다. 1986년 흑자 원년에 이어 97억 8000만 달러(1987년), 142억 7000만 달러(1988년), 51억 300만 달러(1989년) 등 4년 동안 총 34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덕에 1985년 5.1%이던 GNP 성장률은 12.5%(1986), 12.2%(1987), 12.4%(1988)로 높아졌고, 1985년 203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2296달러(1986), 2813달러(1987), 4127달러(1988), 4968달러(1989)로 급증,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소리를 들었다. 주식시장도 호황 국면에 진입, 주가상승률이 68.9%(1986), 95.6%(1987)로 치솟았다. 주식 거래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3월 31일 사상 첫 1000 포인트를 돌파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정부가 사상 처음 겪는 흑자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부동산과 물가 폭등을 야기했다. 부동산은 1987~1989년 3년 동안 전국 평균 2배나 올랐고 1990년에는 전셋값 폭등으로 수많은 서민이 자살로 내몰렸다. 물가까지 폭등해 서민경제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흑자시대는 1989년에 끝이 나고 1990년부터 다시 적자시대로 돌아섰다. 
그 후 3저 호황이 누구 덕이냐를 두고 한때 논쟁이 있었다. 1988년 2월까지 정권을 담당한 전두환 정부 측은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한 반면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측은 호황의 결과가 박정희 시대 때 뿌린 씨를 거둬들인 것이라며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것이 누구의 공이든 흑자시대가 우리에게 선물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이었다. 더불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우리 경제를 진단하는 데 중요한 틀로 작용했던 ‘외채 망국론’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외채는 결국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아 몇 년 후 1997년의 IMF 체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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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개인 비서가 동독 스파이로 밝혀져 총리 사퇴

빌리 브란트는 총리 재임 중 동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1989년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린다. 동방정책은 미소 냉전기에 소련을 비롯 동유럽 제국과의 관계 정상화 정책이다. 하지만 브란트는 총리 재임 시절 자신의 비서가 서독으로 침투한 동독 스파이로 밝혀져 1974년 5월 총리 직을 사퇴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총리 사임 50주년을 맞아 빌리 브란트의 삶과 동방정책을 알아본다.

동서독 분단 25년 만에 첫 정상회담 열어

빌리 브란트(1913~1992)는 사생아로 태어나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며 성장했다. 사실 외할아버지도 어머니의 계부였기 때문에 진짜 외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브란트는 17살 때인 1929년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에 가입했다가 2년 후 탈당하고 1932년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에 가입, 좌파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좌파 정당을 불법화하고 탄압을 강화하자 1933년 4월 노르웨이로 망명, 그곳에서 15년 동안 나치에 저항했다. 1936년 스페인내전 때는 좌파 진영을 지원하는 기자로 참전했으나 그곳에서 소련 공산당의 허구를 목격하고는 사회주의가 본래의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실천하려면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다시 사민당에 가입,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고 서베를린 시장(1957~1966년)을 거쳐 1964년 사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66년 독일인들의 사회적·제도적 개혁 요구로 보수당 연립정권이 붕괴되어 우파 정당인 기민당(기독교민주당)과 자신이 당 대표로 있는 사민당이 이른바 ‘좌우 대연정’을 수립했을 때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입각해 동방정책의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1969년 10월 21일 단 3표 차로 사민당·자민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 총리로 선출되고 나서는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브란트는 취임 일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서로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 뿐”이라고. 
이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 단절도 불사한다’는 기존의 외교원칙 ‘할슈타인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고 브란트가 향후 추진할 동방정책의 확실한 다짐이었다. 브란트의 연설은 그전까지 브란트의 사민당과 연정을 하다 야당이 된 기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기민당의 원내총무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분열주의적 발상”이라며 반통일노선, 분단 고착화, 매국행위라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기민당의 원내 총무는 20년 뒤 독일의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이었다. 
하지만 브란트의 연설에 솔깃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독의 국가평의회 의장 발터 울브리히트였다. 그는 1969년 12월 구스타프 하이네만 서독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동·서독 간 동등한 관계 수립을 골자로 하는 국가조약안을 제안했다. 브란트 총리의 수락에 따라 양측은 동독 국경의 소도시 에어푸르트에서 회담하기로 했다.
브란트 일행을 태운 열차가 서독의 본을 떠나 8시간 만에 동·서독 경계에 위치한 게어스퉁겐 역에 도착한 것은 1970년 3월 19일 오전 7시 45분이었다. 특별열차의 기관차는 이곳에서 동독 기관차로 교체되었다. 서독의 객차를 동독의 기관차가 끄는 '물리적 결합'이 분단 25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브란트를 태운 기관차는 2시간 후 동독의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했다. 수천 명의 동독 국민들이 “빌리!”를 연호하며 종전 이후 25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인 동서독의 정상회담을 열렬히 환영했다. 공교롭게도 동서독 총리 모두 이름이 ‘빌리’였다. 동독 총리는 빌리 슈토프였다. 양측은 3월 19일 하루 동안 두 차례 회담을 열었으나 두드러진 성과는 없었다. 결국 분단 25년 만에 이뤄진 첫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서로의 기존 입장 만을 재확인한 채 2차회담을 서독에서 개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5월 21일 서독의 카셀에서 열렸다. 
2차 정상 회담 후 이견을 좁히려는 실무진 간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70여 차례의 실무접촉이 있은 뒤에야 1972년 12월 21일 서로를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한다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첫 정상회담이 열린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이 ‘기본조약’과 7개월 전 체결된 '통행 조약'을 계기로 동서독 간의 교류는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1969년 110여만 명이던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은 1972년 620여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전개된 1973년 9월 유엔 동시가입, 1974년 3월 상주대표부 개설로 이어진 양측의 거리 좁히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통일이 되기까지 양측 정상은 공식·비공식을 합쳐 9차례 만나 통일의 디딤돌을 놓았다. 

비서가 동독 스파이로 밝혀져 사임

▲ 기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받고 있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한편 브란트는 오래전 알고 있었던 귄터 기욤을 1972년 총리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기욤은 16년간 서독에서 암약한 슈타지(동독의 정보기관)의 스파이였으나 당시만 해도 서독 내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욤이 아내와 함께 여느 동독 주민들처럼 가족 상봉을 한다며 서독으로 위장 잠입한 것은 1956년 5월이었다. 기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담배 가게와 커피점을 운영하며 신분을 세탁했다. 그 무렵 기욤의 아버지가 동독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빌리 브란트에게 배달되었다. 기욤의 아버지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반나치 지하활동을 하던 브란트를 치료한 적이 있는 의사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기욤의 아버지는 옛 친구인 브란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아들에게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란트는 옛 친구의 아들이 자신의 정치조직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도록 주선했다. 
기욤은 1957년 서독 사민당에 입당하고 1964년 사민당 프랑크푸르트 지구당 책임자가 되었다.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에 당선되어 원내교섭단체장을 맡는 등 서독 정치인으로의 변신도 순조롭게 이어나갔다. 1969년 서독 총선 때는 사민당 거물 정치인의 선거본부장을 맡아 그를 당선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 총선에서 사민당은 집권당이 되고 사민당 대표 빌리 브란트는 총리에 취임했다. 기욤은 남다른 성실성과 정무 능력을 인정받아 1972년 빌리 브란트의 비서로 발탁되었다. 이로써 16년에 걸친 슈타지의 스파이 작전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기욤은 브란트의 집에 들락날락거리고 브란트의 책상 위를 오가는 모든 기밀들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극비정보는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슈타지에 보고했다. 심지어 브란트 총리의 과도한 음주와 복잡한 여성관계 등 개인정보도 넘겼다. 
그러나 기욤의 스파이 활동은 1973년 영국 정보통신본부의 암호해독작전을 통해 발각되면서 꼬리가 잡혔다. 영국으로부터 기욤의 스파이 활동을 전달받은 서독의 정보기관인 헌법보호청은 그동안 동독 슈타지가 보낸 암호통신 내용을 재정리한 끝에 슈타지와 기욤이 주고받은 암호를 발견, 기욤이 슈타지의 스파이라는 단서를 포착했다. 헌법보호청장은 내무장관 겐셔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기욤을 계속 감시해 추가 증거를 확보해야 하므로 당분간 해고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겐셔는 이를 브란트 총리에게 보고했고, 브란트는 충격을 받았다. 그후 헌법보호청은 기욤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 1974년 4월 24일 기욤을 체포했다. 서독의 외교·군사 관련 기밀들이 4년 동안 슈타지 수중으로 고스란히 넘어간 뒤였다. 기욤이 체포된 후 “브란트는 궁중 음모의 제물”, “기욤은 궁중 모사꾼들에게 하늘이 때맞춰 내려준 선물”이라는 각종 소문이 무성했다.
브란트는 총리 취임 5년 만인 1974년 5월 7일 “기욤에 대해 주의를 게을리 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난다”는 사임사를 밝히고 정치권을 떠났다. 서독 언론은 “동독을 가장 많이 도와주려 했던 브란트의 등에 동독이 비수를 꽂았다”고 비판했다. 국민들도 기욤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동서냉전의 엄중한 시기에 긴장완화의 용기를 온몸으로 보여준 브란트 총리가 기욤으로 인해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동방정책을 펼쳐온 브란트는 동독에게 우군이었다. 1972년 4월,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투표 때, 동독 정부가 의원들을 매수해 근소한 차로 부결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동독이 결국 브란트를 낙마시키는 실책을 범했으니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가 된 셈이다. 기욤은 징역 13년을 선고받은 후 1981년 동독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칼 마르크스 훈장을 받는 등 여생을 편하게 보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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