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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배 여사, 유격대원 이정숙, 프랭크 댈리 등 12명
정전협정 62주년, 목숨 바쳐 나라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2015년 06월 08일 (월) 00:43:01 신세영 기자 ssy@newsmaker.or.kr

국가보훈처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명예로운 보훈을 추진하기 위한 다양한 호국영웅 알리기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2015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김홍일, 이정숙, 한정일, 김점곤, 프랭크 댈리(미국), 조보배, 김교수, 고종석, 윌리엄 H. 쇼(미국), 전구서, 찰스 그린(호주), 홍대선을 선정했다.

신세영 기자 ssy@

‘이달의 6·25전쟁영웅’은 군부대, 관련단체 등에서 추천 받은 인물 중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등 10명으로
   
▲ 6.25전쟁 당시 북한의 자주포를 파괴해 춘천대첩의 기틀을 마련했던 고(故)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를 기리는 전공기념조형물.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심층 논의해 선정했다. 특히, 올해는 ‘구월산의 여장군’으로 불리며 여러 전공을 세운 이정숙 유격대원과 아들 3형제를 조국에 바치고 평생 봉사의 삶을 산 심일 소령의 어머니 조보배 여사를 포함해 눈길을 끈다. 전장에서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조국 수호를 위해 헌신한 여성들도 명실공히 전쟁영웅이며, 그들의 공헌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민간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아들 셋을 국가에 바친 뒤에도 개인땅을 현충탑 부지로 제공하고 제대군인과 상이국가유공자 정착촌을 건립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조보배 여사를 최종 선정했다. 조여사의 맏아들 심일 소령은 북한군의 자주포를 육탄 공격으로 막아 춘천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영월전투에서 적의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 심일 소령은 2011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바 있다. 둘째 심민은 경찰로 치안 유지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다 근무 중 1960년에 순직(1960년 국가유공자 등록)했으며, 셋째 심익은 서울고등학교 재학중인 17세에 학도병에 자원입대 참전하였으나 실종되었다.

김홍일 중장, 북한군 공격을 한강 방어선에서 성공적으로 저지
   
▲ 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곡성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곡성전투경찰대를 편성해 북한군과 유격전을 펼치는 등의 전공을 세운 한정일 경감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김홍일 육군 중장은 1989년 9월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해 1920년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1944년 중국청년군사대리참모장을 지낸 후 1945년 4월에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독립군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8월 귀국한 뒤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제 1군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김홍일 장군은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하여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한 후 한강 이남에 24km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일주일간 치열했던 한강 방어선 전투는 비록 적의 전차 부대에 밀려 후퇴로 끝났지만 수도권의 국군 주력을 초반에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 계획에 일대 차질을 초래하여 국군이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군의 전략적 후퇴와 미 지상군의 참전 등 차후 작전을 위한 전기가 되었다. 제1군단장에 오른 김홍일 장군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해 진천 남쪽 봉화산-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5일 동안 저지하여 적에게 타격을 입혔다. 낙동강전선으로 철수, 방어에 돌입한 후에는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 침공해온 북한군에 역습포위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비학산 방면으로 격퇴했다. 이 전투로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김홍일 장군은 불리한 전력과 전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는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전시에 급격히 소요가 증대되는 육군 간부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부하를 사랑하라. 평소에 고락을 함께하지 않은 부하는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할 수 없다. 청렴결백하라. 재물을 탐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는 광복군 참모장으로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했고, 광복 후에는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 싸운 그가 사관생도에게 항상 강조하던 군인의 자세에 관한 일언이다. 정부에서는 1956년 태극무공훈장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여 김홍일 장군의 공훈을 기렸으며, 존경의 표시로 5성장군(중국군2성+국군3성)으로 칭했다.

‘구월산의 여장군’ 이정숙 대장, 전우를 구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59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6·25당시 기습, 매복 등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규군이 하기 힘든 위험한 임무를 도맡았던 여러 유격대중 대표적인 유격대가 바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한 구월산 유격부대로, 그중에서도 가장 활약이 컸던 대원이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 대장이다. 이정숙은 1922년 2월 함흥 출신으로, 6.25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었다. 본인도 복역하다가 탈출에 성공,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해 무장대원 70여명과 농민군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과 싸웠다. 이후 서하무장대는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부대에 합류했다. 일명 동키 제2부대로도 불린 구월산 유격부대는 1950년 10월 중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과 이도면 등의 반공 청년들로 조직된 연풍부대를 모태로 해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의 김종벽 대위가 반공청년들의 자생적 무장조직을 규합하여 1950년 12월 7일 창설한 유격대이다. 최초 대원의 규모는 약 150여 명이었으나 많은 북한 피난민들이 가담하여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구월산 유격부대에 합류한 뒤 이정숙은 김종벽 대위의 보좌관 직책을 맡아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1951년 1월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이외에도 공산군 습격을 위한 월사리 반도 상륙작전, 어양리 지역 상륙 작전 등에 참여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구월산의 여장군’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여자 유격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정숙의 활약상은 196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으며,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그려져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한정일 경감, ‘곡성전투경찰대’ 편성해 유격전 펼쳐
   
▲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 한 달도 안 되어 남한의 대부분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광주, 순천, 광양까지 함락되던 무렵, 전남 곡성경찰서에도 “모두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곡성경찰서장이던 한정일 경감은 “주민을 버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곡성전투경찰대’를 조직했다. 7월 24일 경찰과 의용대원 중 자원자를 중심으로 전투가 가능한 520명을 인솔하여 곡성군 태안사에 입산한 한정일 서장은 전투중대 4개 중대, 유격대 1개 중대, 정찰대 1개 소대 등으로 조직을 편성 후 인근 산악지대에 배치하여 즉각적인 출동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7월 28일 오후 생포한 북한군으로부터 순천에 진입한 북한군 제6사단 중 일부(603기갑연대)가 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29일 정오경 압록교(섬진강 상류)를 통과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한정일 서장은 매복 작전을 펼쳐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3개 중대를 상대로 벌인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 52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1명만 사망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타격을 입은 적군이 다시 압록교를 넘기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전투경찰대의 피해도 컸다. 8월 6일 새벽 북한군 1개 연대의 기습 반격으로 인해 태안사에서 48명의 경찰관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다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전남 광양 백운산으로 철수한 한정일 서장은 다시 잔여 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기습하는 등 유격전을 지속하여 끊임없이 북한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전쟁 초기 유격전이 국군 낙오병과 일반인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과 달리 한정일 서장이 이끈 곡성전투경찰대는 조직력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했다는 점과 압록교 전투를 대표적인 경찰 승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점곤 육군 소장,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처음 입성하는 영예 달성
   
▲ 한국 해병대가 1950년 9월 15일 적색해안으로 명명된 상륙목표지점으로 상륙하고 있다.
6.25당시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한 제1사단은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의 8월 공세를 겪게 되었다. 8월 3일부터 9월 2일까지 약 한 달에 걸쳐 계속된 낙동강 지역의 다부동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군이 펼쳤던 ‘베르뎅전투’에 비유될 만큼 처절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김점곤 소장이 이끄는 1사단 12연대는 특공대를 편성,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김일성 군대가 사활을 걸고 전력을 집중하던 낙동강 전선을 끝까지 막아내는 개가를 올림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한편, 방어전을 완료하고 9월 25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한 제1사단은 10월 11일 마침내 38도선을 돌파하고 평양탈환작전에 돌입했다. 김점곤 장군의 제1사단 12연대는 완강히 저항하는 적의 공격을 제압하고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해 국군의 자존심과 명예를 고양했다. 이처럼 탁월한 지휘력과 철두철미한 판단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전쟁 영웅으로 인정받은 김점곤 소장은 전역 후에는 강단에 선 최초의 군 출신 교수가 되어 ‘학자 같은 군인, 군인 같은 학자’로서 후세의 존경을 받았다.

프랭크 댈리 “나에게 주어진 단 한명의 병사도 잃지 않을 것”
1951년 5월 26일 밤, 중공군과 교전이 한창이던 경기도 가평의 홍종리 인근, 프랭크 댈리(J. Frank Dalley) 중령이 이끄는 제213야전포병대대에 미군 제24사단 21보병연대를 포격 지원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포병부대를 경호하던 전투 병력이 적군을 봉쇄하기 위해 전진하면서 포병부대는 전투 병력의 보호 없이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4천 명에 달하는 중공군은 240명의 병력에 불과한 포대가 지키고 있는 좁은 협곡을 돌파구로 삼기 위해 맹
   
▲ 프랭크 댈리 미국 육군 준장
렬히 공격해 왔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전투는 흡사 백병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포화 속에서 협곡을 둘러싼 능선을 오르려고 시도했던 적군은 미군의 공격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고, 퇴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규모로 투항해 왔다. 350명의 적군이 전사하고 830명 이상이 생포되거나 투항하는 대기록을 남긴 이날의 전투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제213야전포병대대에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유타주 서밋 출신의 프랭크 댈리 중령은 그 누구보다 병사들의 안전과 운명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213부대는 모두 유타 주의 인근 마을에서 온 600명의 어린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부대원은 댈리 중령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주었다. 파병 당시 약 187파운드(약 85kg)였던 그의 몸무게는 1년 후 부대원에 대한 근심과 스트레스 때문에 147파운드(약 67kg)로 줄었으며 갈색이던 머리도 백발이 되었다. 프랭크 댈리 중령은 자신에게 맡겨진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에 600명 전원이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유타주 주민들은 이를 두고 ‘가평의 기적’ 또는 ‘가평의 전설'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기리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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