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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美 전 국무장관 대선 출마 선언
미국의 첫번째 여성 대통령 가능할까
2015년 05월 10일 (일) 02:24:24 이종서 기자 jslee@newsmaker.or.kr

힐러리 클린턴 미국 전 국무장관이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대선 후보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클린턴 전 장관은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을 정조준하게 됐다.

이종서 기자 jslee@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은 지난 4월12일(현지시간) 오후 소셜미디어와 자신의 선거 웹사이트를 통해 동시에 공개한 웹 비디오를 통해 “대통령직을 노리고 출마하겠다”며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차기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각종 여론조사서 가장 높은 지지율 얻어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은 “미국인들은 힘든 경제적 시기를 견뎌내 왔지만 아직도 상황은 녹록치 않다”며 “모든 미국인들에게는 챔피언이 필요하며 이제 제가 그 챔피언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이상을 해낼 수 있으며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며 “우리의 가정이 강해질 때 비로소 미국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중산층 재건과 경제 회복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풀이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아내로서 퍼스트 레이디에 올랐던 클린턴 전 장관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야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은 물론이고 사상 첫 부부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번이 그의 두 번째 대권 도전으로, 앞선 지난 2008년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에 밀려 민주당 경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오바마가 그녀를 국무장관에 임명하면서 공고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로써 오바마 대통령을 승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에서 민주당 경선에 들어가게 된다. 이날 공식 발표 직후 클린턴 전 장관은 곧바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주요 경선 격전지인 아이오와주(州)와 뉴햄프셔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등으로 이동해 유세를 펼칠 예정이다.

아이오와주는 지난 2008년 민주당 경선 당시 클린턴이 3위에 머물렀던 곳이다. 클린턴은 최근 자신이 중산층의 경제적 안정을 강화하는 한편 근로자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출마한다는 시사를 던져왔다. 지난 4월11일부터 미주기구(OAS) 회의 참석차 파나마를 방문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클린턴 전 장관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게 될 경우 그것은 그가 미국이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아주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대선 출마를 발표한 힐러리 전 국무장관은 페이스북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4시간만에 55만명에게 ‘좋아요(Like)’를 받으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마케팅에 성공했다. 블룸버그통신은 4월12일(현지시간) 오후 3시께 힐러리가 페이스북에 선거 페이지를 만들자마자 단 4시간만에 55만5000명이 ‘좋아요’로 관심을 표했으며, 101만명이 선거 비디오를 봤다고 보도했다. 힐러리는 SNS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4월12일 전까지는 페이스북에 선거 전용 페이지를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힐러리의 트위터 팔로워 수는 총 327만명으로 공화당 측 후보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17만6000명), 랜드 폴 상원의원(59만3000명) 보다 월등하게 앞선다. 이로 인해 페이스북에서 힐러리의 입지는 다른 후보들보다 약한 편이다. 페이스북에서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의 페이지는 121만5000개의 ‘좋아요’를 받았으며,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170만개, 랜드 폴 상원의원은 188만5000개,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72만5000개를 받았다. 하지만 블룸버그통신은 이들은 수년 전부터 페이스북에서 입지를 쌓아온 반면 힐러리는 단 수 시간 만에 55만명의 지지자를 얻어낸 점이 고무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좋아요' 수에서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16만7000개), 바비 진달 루이지애나 주지사(23만3000개) 등 공화당 후보와 주요 인사를 앞지른 점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힐러리는 선거 출마를 밝힌 트윗이 1시간만에 300만회 리트윗(퍼가기)되는 등 트위터에서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두 번째 대통령 선거 도전하는 힐러리
공부 잘하는 소녀, 정치의 중요성에 눈 뜬 젊은 법조인, 주지사 부인과 대통령 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 그리고 두 번째 대통령 선거 도전. 4월12일(현지시간) 마침내 대권 도전을 공식으로 선언하는 힐러리 클린턴(68)이 걸어온 길이다. 1947년 10월 26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힐러리 다이앤 로댐은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맞는 모범적이면서 공부 잘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10대 후반이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힐러리는 고교 졸업 전인 1964년에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의 지역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5년 미 동부의 유명 여자 대학인 웰슬리에 입학한 힐러리는 정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도 ‘공화주의자 클럽’이라는 동아리를 이끄는 등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워 갔다. 힐러리가 공화당원에서 민주당원으로 전환한 계기는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전역에 불어닥친 민권운동 열풍이었다. 특히 1968년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 사건과 베트남 전쟁은 힐러리의 정치 지향을 바꾼 주요 계기로 지목된다. 1969년 힐러리는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곧바로 한 살 많은 아칸소 주 출신 법학도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사건은 힐러리의 장래를 결정한 일로 평가된다. 1975년 10월 빌과 결혼한 힐러리는 남편과 함께 아칸소 주로 향한다. 1976년 빌이 아칸소 주 법무장관으로 일하게 되자 힐러리 역시 로즈 법무법인에 입사해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꾸준히 경력을 쌓고 1978년 처음으로 당선된 뒤 꾸준히 아칸소 주지사로 일하는 동안 힐러리 역시 연방정부기관 이사나 아칸소 주 교육표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무 감각을 유지했지만 빌이 1991년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힐러리는 자신의 일을 가진 주지사 부인과 1980년 태어난 딸 첼시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주력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 칭호를 얻었지만, 분석가들은 빌의 재임 기간에 힐러리는 자신의 일과 남편의 일 사이에서의 고민은 물론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숙고하기 시작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특히 빌의 첫 임기 때 불거진 아칸소 주 화이트워터 지역 부동산 개발 사기 사건과의 연루 논란인 ‘화이트워터 사건’과 남편의 두 번째 임기 때에 터진 불륜·탄핵 파문은 힐러리의 고뇌를 한층 더 깊게 만들었고, 결국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나서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고 분석가들은 설명했다. 상원의원으로 있던 시기에는 두드러진 업적을 냈다기보다는 ‘정치인 힐러리’라는 이미지를 굳혀 가는 과정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대통령 부인 출신 첫 상원의원으로서 2003년 출간한 회고록 <살아있는 역사>에서는 자신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선언한 점도 그런 평가의 바탕 중 하나다. 2007년 힐러리는 드디어 대통령 부인이 아닌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을 드러냈다. 꾸준한 준비 덕에 선거운동 초반에는 예비주자 중 주목받기도 했던 힐러리였지만 일리노이 주에서 정치 기반을 닦은 ‘초신성’ 버락 오바마의 빛에 압도됐고, 결국 2008년 6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오바마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힐러리가 오바마 1기 행정부의 국무장관 자리를 받아들인 일은 오바마의 포용력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있지만, 힐러리 자신의 정치 감각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뜻한다는 분석 또한 있다. 미국 대통령이 되려면 자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미국 외교의 사령탑인 국무장관 자리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국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힐러리는 그 후 약 1년6개월 간 차근차근 두 번째 대권 도전을 준비해 왔다. 새 자서전 <힘든 선택들>을 펴내는 한편 딸의 출산을 계기로 자신의 여성성을 부각시켰고, 2012년 리비아 벵가지 영사관이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아 리비아 주재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숨진 ‘벵가지 사건’에 대한 공화당의 공세에 대해서도 대응 논리를 개발해 왔다. 워싱턴DC의 정치 소식통들은 힐러리가 후보경선 과정에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과 다시 한 번 대면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그에 대응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권 도전이라는 큰 결단을 다시 한 번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 美 여성 대통령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
영부인, 국무장관, 상원의원 등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부장관. 과거 스캔들, 과실 등은 첫번째 미국 여성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있어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클린턴 전 장관의 과거와 관련 이미 “수십년에 걸쳐 비밀과 스캔들의 기록이 있다”고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추문 스캔들은 민주당의 수퍼스타 커플인 클린턴 부부를 끈질기게 괴롭혀왔다. 그는 아칸소 주지사로 일할 당시 주 공무원이였던 폴라 존스로부터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피소됐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8년 전 기자 출신인 제니퍼 플라워스와 친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으나 힐러리 여사와 나란히 CBS 시사프로에 출연한 자리에서 플라워스 사건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장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당시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스캔들이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말로 위증하고 사법방해 혐의로 하원 탄핵까지 받았지만 상원에서 부결됐다. 공화당 대선 후보 중 한명인 랜드 폴 상원의원은 지난해 “이는 힐러리의 잘못이 아니다”면서도 바람둥이를 대통령의 남편 자격으로 다시 백악관으로 보냄으로 써 피해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아칸소주는 클린턴 부부에 있어 정치인으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할 수 있게 한 ‘축복의 땅’이지만 토지 개발 스캔들을 피해갈 수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아칸소주에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거쳐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그가 아칸소주지사로 재직하고 힐러리 여사가 변호사로 일할 당시 화이트워터는 휴양지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 계획이 실패하면서 투자자에게 큰 손실을 끼쳤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부당 금융 대출 등에 연루됐었다. 당시 부동산사기 사건의 핵심인물 제임스 맥두걸은 징역형을 살았으나 클린턴은 기소되지 않았다. 클린턴 부부는 주요 요직을 거쳤으나 그들이 늘 부유한 것은 아니였다. 이들은 아칸소주에 거주하던 시절 소박한 생활을 한 것으로 했었다.

‘정치적 고향’인 아칸소를 떠나 워싱턴에 둥지를 튼 클린턴 전 장관은 지난해 A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부부는 2001년 퇴임 당시 변호사 비용 등으로 완전히 빈털터리(dead broke)였을 뿐 아니라 수백만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999년 뉴욕 카파쿠아에 170만달러짜리 자택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워싱턴에 7개의 침실을 갖춘 285만달러짜리 자택을 매입했다. 이와 관련 힐러리 전 장관은 여러 강연으로 인해 수백만달러를 벌었으며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훌륭한 기회’가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 문제를 이용해 힐러리 후보를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2012년 9월 11일 리비아 무장반군이 벵가지 미 영사관을 공격한 사건은 그에게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당시 공격으로 크리스토퍼 스티븐슨 대사 등 4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공화당은 이 사건을 힐러리 전 장관을 압박하는 하나의 소재로 삼고 있다. 벵가지 사건과 관련해 클린턴 전 장관과 그의 측근들이 개인 이메일을 통해 의견을 주고 받은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이번 사안이 확대대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그는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던 4년 동안 정부 이메일 계정을 신청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그의 보좌진도 당시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들을 국무부 서버에 저장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행정부 관리들의 통신 기록을 저장해두어야 한다는 연방기록법에 대한 위반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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