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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7월 11일 (월) 12:14:4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한동일의 리벤트리트 콩쿠르 우승(1965년)은 한국 콩쿠르 신화의 출발점

피아니스트 임윤찬(18·한국예술종합학교)이 2022년 6월 18일 세계적 권위의 피아노 경연대회인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최종라운드에서 5명의 경쟁자를 누르고 최고 점수를 얻어 1위(금메달)를 차지했다. 이 대회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이다. 이로써 한국은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또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런 오늘이 있기까지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은 1965년 미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동일이다. 한동일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57년 전 세계적 권위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는지를 살펴본다.

미 CBS TV ‘에드 설리번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온 피아노 신동”으로 소개  

한동일(1941~ )은 한국이 낳은 첫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다. 6·25 직후 혼란스럽던 시절,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던 그의 도미 성공담은 어렵고 팍팍했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자부심을 심어주고 숨통을 틔워주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한동일은 생후 13개월 만에 동요 ‘나비야’를 흥얼거릴 정도로 청감이 뛰어났다. 한동일이 유아였을 때 아버지는 함흥 중앙교회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때때로 합창단과 함께 집에서 연습을 했다. 한동일이 3살 때 합창단의 누군가 집에서 치고 간 피아노 곡을 한동일이 흉내낸 것을 본 아버지는 곧 한동일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대지주였던 한동일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린 한동일이 치던 피아노도 빼앗아갔다. 결국 한동일 가족은 1946년 월남해야 했고 아버지는 1947년 서울관현악단(서울시향 전신) 창단 멤버로 들어가 한국 최초의 팀파니스트로 활동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 피아노 교육이 중단된 한동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는 당시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 김성복이었다. 한동일은 김 교수의 돈암동 집을 드나들며 피아노를 배웠다.
한동일이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다닐 때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져 가족은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1953년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배재중 1학년이던 한동일은 학교에 다니며 미 제5공군사령부(지금의 서울대의대 자리) 강당에 피아노가 있는 것을 알고 미군의 협조를 받아 매일 2시간씩 연습을 하는 것으로 피아노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1953년 10월에는 강당에서 미군을 상대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날 한동일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한 제5공군사령관 새뮤얼 앤더슨 사령관이 그 자리에서 한동일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다.
앤더슨 사령관의 약속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의 주선으로 한동일의 유학자금을 모금하는 연주회가 그해 11월과 12월 두달 간에 걸쳐 주한 미공군 기지 24군데서 진행되었고 1954년 1월 일본 내 미 공군기지에서도 모금을 겸한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이 끝나면 수북이 쌓인 5센트, 10센트짜리 동전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4500달러로 불어나 유학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미국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도 “폐허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라며 입학을 허락한 덕에 한동일은 1954년 6월 1일 본국으로 귀임하는 앤더슨 장군의 프로펠러 군용기를 타고 ‘꿈의 장도’에 오를 수 있었다. 한동일은 어머니와 이화여전 동창생으로 뉴욕에 살고 있는 성악가 김자경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며 중학교에 다녔다. 줄리아드는 예비코스였기 때문에 토요일에만 다녔다.
한동일은 미국 도착 1개월 만인 1954년 7월 25일 미 CBS TV ‘에드 설리번쇼’에 출연,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온 피아노 신동”으로 소개되었다. 한동일이 1955년 로스앤젤레스와 덴버 등에서 지역 교향악단과 협연하고 1956년 4월 28일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는 영광의 기회를 얻게 된 것 역시 앤더슨의 도움 덕분이었다. 1960년대는 한동일의 전성기였다. 20살이던 1961년 줄리아드 기악 독주 선발경연대회에 이어 시카고 교향악단 주최 음악경연대회에서 1위로 입상했다. 1962년 11월 미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열린 청소년을 위한 뮤지컬 프로그램에 참가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번스타인 심사위원장 “동양에서 온 모차르트”라고 극찬

▲ 한동일이 1962년 11월 19일 미 백악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출처 위키피디아)

한동일이 마침내 세계적 권위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65년이었다. 10월 27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리벤트리트 피아노 콩쿠르에서 마침내 1위에 입상함으로써 한국이 배출한 첫 세계적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른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을 맡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한동일은 마치 전기가 온몸에 관통하는 듯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번스타인이 “동양에서 온 모차르트”라고 극찬하게 한 그의 1위 입상은 정경화(바이올린), 백건우(피아노), 정명훈(피아노)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콩쿠르 신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굴지의 교향악단들로부터 협연 초청이 잇따랐고 한동일은 미국과 유럽을 넘나들며 1년에 70회가 넘는 꽉 짜인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일은 자신이 예술가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연주 기계’, ‘연주 상인’으로 느껴졌다. 15~16년간 쉬지않고 연주를 강행하다 보니 음악적 영감도 고갈되어 “한낱 음악을 파는 장사꾼”이라는 자기비하 의식에 빠져들었다. 이런 그를 구해준 것은 1969년 인디애나대의 교수 초빙이었다. 이후 일리노이주립대(1971년), 노스 텍사스주립대(1977년), 보스턴음대(1987년)를 옮겨다니며 연주와 교육을 병행했다. 한편 한동일이 ‘미국인 아버지’로 모셨던 앤더슨 장군은 미 국방성 근무 중 1958년 대장 진급과 함께 앤드류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전임됐다가 유럽의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 부사령관을 끝으로 은퇴한 후 1982년 타계했다.
한동일은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로서의 자부심과 미국 내에서 우대받는 명교수로서의 자존심으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 속 밑바닥에는 늘 ‘조국’이 꿈틀거렸다. 10대 때인 1958년 7월 첫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비교적 조국을 자주 찾았다. 2004년 6월 1일에는 도미 50주년을 기념하는 국내 콘서트를 서울시향과 가졌다. 91세 아버지가 팀파니 스틱(북채)을 들고 50년 전 어린 한동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김성복 교수의 아들 이대욱이 지휘를 맡아 더욱 감격스런 무대가 되었다. 그 콘서트는 한동일 음악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공연 후 “이제 조국으로 돌아올 때”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한동일은 2005년 미국에서의 교편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 울산대 음대 학장과 석좌교수, 순천대 석좌교수, 일본 히로시마 엘리자베스 음악대학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2019년엔 미국 시민권자로 산지 60여년만에 한국 국적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고국 정착에 동참하지 않은 프랑스인 부인과 이혼하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었다. 한동일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3악장으로 구성된 피아노 소나타에 비유한다. 6·25 전쟁 포화 속에서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가 소나타 1악장이라면 1954년 6월 도미 후 50년 동안의 미국 생활은 2악장이고 2005년 영구 귀국 후 죽는 날까지의 삶이 3악장이라는 것이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2세가 19세기 말, 아프리카 콩고에 가한 야만과 광기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과거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의 콩고 의회를 2022년 6월 8일 방문해 과거 식민 지배(1885~1960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2020년에도 역대 벨기에 국왕 중 처음으로 콩고 식민 지배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콩고 일각에서는 “잔혹한 식민 통치에 대한 반성으로는 부족하다”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이 나와야 한다며 반발했다. 벨기에는 과거 무엇을 잘못하고 왜 정부가 아닌 왕실이 사과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본다.
 
헨리 스탠리, 아프리카 오지에서 리빙스턴을 찾아낸 후 기자직 버리고 탐험가로 변신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은 의사이자 선교사로 1841년부터 30여년간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했다. 그가 탐험한 곳 중 많은 지역이 백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땅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에 충실하면서도 탐험 중 목격한 노예 제도를 비난했다. 1866년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아 떠난 네 번째 탐험을 시작했는데 3년 째부터 연락이 두절되어 서양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러자 미국의 ‘뉴욕헤럴드’지가 리빙스턴을 찾아 나서는 기획물이 흥미를 끌 수 있다고 판단해 헨리 모턴 스탠리(1841~1904)를 아프리카 특파원으로 파견했다.
스탠리는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 구빈원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18살이던 18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남군과 북군을 바꿔가며 남북전쟁에 참가했다. 종전 후에는 지역신문의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는데 기사를 부풀리거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지만 감상적이고 화려한 문장 덕에 1868년 뉴욕헤럴드의 순회 특파원으로 채용되었다. 1869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리빙스턴을 찾아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스탠리는 190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꾸려 1871년 봄, 리빙스턴을 찾아 아프리카 동해에서 내륙으로 출발했다.
스탠리는 8개월간의 고된 여행 끝에 1871년 11월 3일 바깥 세상과 수 년 간 단절되어 있던 리빙스턴을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서 찾아냈다. 그가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라고 인사했다는 첫 대화는 탐험사의 명장면이자 인류애의 귀감으로 기록되어 한동안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리빙스턴은 함께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권유를 뿌리치고 아프리카에 2년 더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뉴욕헤럴드가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대서특필하면서 스탠리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리빙스턴이 사망한 터라 모험담을 과장하거나 각색해도 아무도 스탠리의 말과 글에 토를 달지 못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이 평생을 바쳐 제작한 지도를 활용하면 돈방석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자직을 버리고 탐험가로 변신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해안가 일부만 열강들이 진출했을 뿐 아프리카의 약 80퍼센트에 해당하는 내륙은 여전히 토착민 족장들이 지배하는 무주공산의 땅이었다. 영국·네덜란드·스페인·프랑스 같은 열강들이 아프리카 분할 경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내심 식민지 구축에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왕이 있었으니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2세(1835~1909)였다. 그러나 벨기에 의회는 식민지 개척에 시큰둥했다. 1831년 중립국 지위로 독립을 선언한 벨기에 군사력이 바다 건너 식민 영토를 확보할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을 무모한 도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폴드2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리빙스턴을 찾아낸 스탠리를 잘만 활용하면 식민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탐험가로 변신한 스탠리는 1874년 대규모 아프리카 탐험을 준비했다. 미국의 ‘뉴욕헤럴드’와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라프’가 재정 지원한 350여명의 대규모 탐험대는 1874년 아프리카 동해쪽 잔지바르를 출발해 내륙을 거처 서해쪽으로 이동했다. 스탠리는 탐험 중에 100여개에 달하는 마을을 공격하고 파괴했다. 저항하는 원주민은 사살했다. 스탠리는 1만1000㎞ 이상을 탐험한 끝에 2년 반이 지난 1877년 8월 콩고강 하구에 도착했다. 이 탐험은 960페이지짜리 ‘검은 대륙 횡단기’로 세상에 나왔다. 과장과 허위도 있었으나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 레오폴드2세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생지옥

레오폴드2세는 스탠리의 탐험 소식을 꼼꼼이 체크하는 한편 훗날 아프리카로 진출할 때 열강의 반대 의견이 없도록 노예무역 금지와 과학적 진보를 표방하는 인도주의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했다. 1876년 9월에는 유명 탐험가와 지리학자 등을 불러모아 벨기에 브뤼셀에서 지리학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중 국제아프리카협회가 창설되고 레오폴드2세가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레오폴드2세는 1878년 6월 스탠리를 벨기에로 초대해 스탠리가 콩고에서 5년 동안 레오폴드2세를 위해 근무한다는 계약에 합의했다.
스탠리는 1879년 콩고로 떠나 콩고를 레오폴드2세 땅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5년간 벌였다. 스탠리는 원주민 추장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 술과 옷감 등을 선물하며 원주민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전달했다. 종이는 원주민들의 영토소유권, 노동력, 자원 소유 이관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 위임장이었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추장은 서명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위임장에 서명했다. 그렇게 모은 500여장의 위임장은 머지 않아 레오폴드2세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벨기에 면적의 76배나 되는 엄청난 땅이 레오폴드2세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 땅이 자신의 영토로 되려면 무엇보다 열강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열강이 경계하지 않도록 자신의 아프리카 진출이 인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홍보 선전한 덕에 미국, 프랑스로부터 콩고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총리는 소유권을 인정하는 한편 차제에 아프리카 케이크를 분할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수립하자며 베를린 회담을 제안했다. 1884년 11월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관저에 모인 열강 대표들은 주로 아프리카 해안선 일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내륙의 방대한 땅을 레오폴드2세에게 양보하는 데는 큰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회담이 무사히 끝나자 레오폴드2세는 1885년 5월 29일 자신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 새 나라 이름을 콩고자유국으로 정했다. 이로써 레오폴드2세는 오랫동안 꿈꿔온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다만 벨기에 의회가 식민지 경영에 반대해, 국가가 아닌 레오폴드2세 개인에게 귀속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소유 식민지였다.
레오폴드2세는 당초 스탠리를 총독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심복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다만 콩고 총독은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 총독과 달리 실권이 크지 않았다. 콩고자유국의 간부는 왕이 직접 선발하고 관리했다. 주요 칙령 모두 벨기에 왕실에서 내려왔다. 레오폴드2세는 1888년 콩고국의 공식 군대를 조직했다. 군대는 이후 10여년 동안 1만9000명으로 증강되었는데 중앙아프리카에서는 가장 강력했다. 백인 장교들마다 휘하에 거느린 수십명의 흑인들은 용병이거나 강제로 징발된 콩고 원주민이었다. 수시로 일으키는 원주민의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하는 일도 임무 중 하나였다.
레오폴드2세가 처음 관심을 가진 품목은 상아였다. 콩고의 상아 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들을 이용해 코끼리를 사냥하게 했다. 그러던 중 고무 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가 발명되고 호스와 튜브 등이 개발되면서 18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고무 수요가 폭발했다. 그러자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가 덮고 있던 콩고는 잔혹하고 폭압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열대 우림의 습지에서 맨몸으로 하는 고무 채취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호 장비가 없어 나무에서 수시로 떨어져 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주민들이 거부하면 총독과 관리인은 원주민을 밀림으로 밀어 넣기 위해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했다. 원주민의 아내나 딸을 감금한 뒤 할당량을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했다. 거부하면 곧바로 가족을 강간하거나 죽였다. 단체로 노동을 거부하는 마을은 총칼을 앞세워 몰살시켰다.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은 콩고인들의 손목을 자른 행위였다. 원주민들이 할댱량을 채우지 못하면 처음에는 손목을 잘랐다. 그런데도 채우지 못하면 팔 전체를 자르고 마지막으로 목을 잘랐다. 인정사정없는 착취와 수탈, 극악무도한 살육으로 콩고는 서서히 생지옥으로 바뀌었다. 콩고에서 이런 참상이 벌어졌으나 레오폴드2세는 학살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보지 못했다. 콩고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고 브뤼셀에서 노예 노동을 원격조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은 레오폴드2세의 궁전과 기념비를 짓는 데 쓰였다. 일부는 16세의 프랑스 콜걸에게 저택과 값비싼 드레스를 사주는데 들어갔다. 놀라운 것은 레오폴드2세가 유럽 전역에서 인자한 군주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새 식민지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군대는 흑인들을 약탈해 온 아랍 노예상인들을 물리쳤다”고 선전했다. 유럽 언론들은 “사재를 털어 아프리카 공익사업을 펼치는 계몽군주”로까지 칭송했다.

‘야만과 광기’를 거치는 동안 인구가 1000만명이나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어

이 전대미문의 참극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 해운회사 직원 에드먼드 모렐에 의해서였다. 물론 모렐의 폭로 전에도 콩고의 참상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의 흑인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가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그는 1890년 콩고에서 6개월간 체류하면서 알게된 참상을 레오폴드2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세상에 알렸다. 스탠리는 거짓과 욕설, 거친 성격과 주먹으로 일관된 독재자이고 레오폴드2세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까발렸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도 손이 잘려나간 원주민 사진을 공개하는 식으로 레오폴드2세의 잔혹한 통치를 폭로했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레오폴드2세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것은 모렐이었다. 벨기에 앤트워프항에서 화물 하역을 감독하던 모렐은 콩고에 드나드는 무역 기록 등을 토대로, 레오폴드2세가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콩고 원주민들을 상대로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렐은 레오폴드 2세의 가면을 벗겨나가면서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모렐의 호소에 동참한 유명 인사 중에는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과 코넌 도일, 시인 아나톨 프랑스, 영국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도 있었다.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광을 좇아 증기선 선원이 된 폴란드계 영국인 조지프 콘래드(1857~1924)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콘래드는 30대 초반이던 1890년, 유럽의 문명이 미개한 아프리카에 전파되는 현장을 콩고에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6개월간 체류하면서 그가 목격한 광기와 만행은 끔찍했다. 콘래드는 콩고 체험을 8년 동안 곱새긴 끝에 소설 ‘어둠의 심연’(1899년)에 담아냈다.
훗날 이 소설을 베트남전에 맞게 각색한 영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년)이다. 코폴라 감독은 ‘지옥의 묵시록’을 지배하는 공포와 광기의 원형이 콘래드의 책에 있다고 했다. ‘지옥의 묵시록’에는 입으로는 바이런의 시구를 읊으면서도 손으로는 사람의 목을 태연히 자르는 이중적 인물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이 등장한다. 커츠 대령이 스탠리를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레오폴드왕의 유령’의 저자인 아담 호크쉴드는 21개의 두개골로 화단을 장식한 당시 콩고 공안군의 레옹 롬 대위를 꼽는다.
콩고의 실상이 하나둘 세상에 알려지자 레오폴드2세를 향해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 이미 거대한 식민지를 착취·수탈한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조차 레오폴드2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에 가세했다. 결국 레오폴드2세는 1908년 콩고를 개인 사유지에서 벨기에 국가의 식민지로 바꾸어 비난을 피해갔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에서 벌어진 참상을 몰랐다고 끝까지 잡아뗐다.
그 ‘야만과 광기’의 20여 년을 거치는 동안 콩고 인구가 무려 1000만명이나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담 호크실드는 ‘레오폴드 왕의 유령’에서 ‘1000만 대학살’의 원인이 복합적이라고 분석했다. 피살자들뿐 아니라, 질병과 기아로 사망한 원주민도 이 숫자 안에 포함되고 가혹한 착취로 인해 출산율이 급감한 것 역시 콩고 인구를 급감시킨 원인으로 꼽는다.
레오폴드2세는 콩고를 포기한 이듬해(1909년) 사망하고 콩고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더 흐른 1960년에야 벨기에에서 독립했다. 그런데도 벨기에 왕실은 오랫동안 레오폴드2세가 “콩고에 가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잔학 행위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해왔다. 국민들 사이에도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학살은 벨기에와 무관하다. 책임지거나 사과할 필요 없다”는 여론이 다수였다. 벨기에가 19세기 아르누보의 중심지가 되고 대대손손 자랑할만한 아름다운 유산을 갖게 된 것이 ‘건축왕’으로 불린 레오폴드2세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20년 벨기에에서 식민역사 청산 운동이 일어났다. 벨기에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없애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가 벨기에 왕실의 사과로 이어진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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