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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5월 12일 (목) 11:09:4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쉰들러 비서의 죽음을 계기로 살펴본 ‘쉰들러 리스트’와 쉰들러의 삶

▲ 오스카 쉰들러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위험에 처한 유대계 1100여 명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를 도와 유대인 구출에 힘쓴 쉰들러의 비서 미미 라인하르트가 지난 4월 8일 향년 107세로 숨졌다. 본인 또한 유대계인 라인하르트는 1944년 폴란드 크라쿠프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속기를 알고 독일어가 유창한 덕분에 쉰들러의 비서로 채용되어 쉰들러의 공장에서 작업할 유대계 노동자 명단을 작성했다. ‘쉰들러 리스트’로 불린 이 명단에 오른 유대인은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쉰들러 리스트’와 리스트를 작성한 오스카 쉰들러에 대해 알아본다.

젊은 시절 쉰들러는 난봉꾼에 나치당원

오스카 쉰들러(1908~1974)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던 부유한 독일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사치를 일삼고 여자와 술과 도박을 좋아한 난봉꾼이었다.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었다. 나치당원으로 활동해온 쉰들러는 전쟁을 이용해 한밑천을 잡겠다며 1939년 10월 폴란드 남부의 크라쿠프로 갔다. 그곳에서 나치 친위대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아 부를 축적했다. 그 돈으로 유대인 소유의 에나멜 그릇 공장을 헐값으로 인수해 공장에서 생산한 그릇과 냄비들을 군용으로 납품했다.
공장에는 100여 명의 노동자가 있었고 일부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노동력은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어 유대인 노동자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업도 번창했다. 1942년에는 800여 명의 노동자 중 유대인이 370명이나 되었다. 유대인들은 공장과 가까이 있는 크라쿠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조달했다. 공장의 유대인들은 쉰들러를 폴란드 점령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또 한 명의 나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낙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을 모욕·구타하거나 총으로 죽이는 나치 친위대가 쉰들러 공장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점점 많은 공장 내 유대인이 공장 밖에 있는 자신의 가족과 친척을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쉰들러에게 간청했다. 쉰들러는 청을 들어주었다.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노인들 나이는 서류상으로 적게 기입하고 아이들은 성인인 것처럼 나이를 올려 기입했다. 변호사, 의사, 예술가들은 금속 노동자와 기술자라고 허위 기재했다. 독일의 군수 경제와 산업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강변해야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42년 10월 나치가 ‘크라쿠프 작전’으로 명명한 잔혹한 게토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1943년 3월까지 계속된 ‘크라쿠프 소탕 작전’으로 2,000여 명의 유대인이 게토에서 죽고 2,000여 명이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갔으며 4,000여 명은 플라주프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플라주프 수용소장이자 친위대 대위인 아몬 괴트는 폭력, 예측 불허, 사디즘으로 악명을 떨쳤다. 괴트로 인해 많은 유대인이 죽거나 다치자 쉰들러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괴트의 무자비한 성격 탓에 자칫 자신의 유대인 노동자들까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죽음으로 내몰린 1,098명 유대인 빼내

쉰들러는 괴트가 여자와 술과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가깝게 지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장을 크게 확장할 계획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렇게 괴트에게 공을 들이고 평소 뿌려놓은 뇌물의 힘이 작용해 쉰들러는 본인이 직접 관리·운영하는 수용소를 설립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쉰들러는 공장 인근에 수용소를 만들어 나치의 감시병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거나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수시로 성대한 파티를 열어 괴트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독일의 패전이 임박한 1944년 여름 강제수용소 소장들에게 “건강한 수용자들은 서부 독일로 보내고 노동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수용자들은 말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플라주프 강제수용소와 쉰들러의 수용소에서도 5,000여 명이 멀리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끌려갔다. 쉰들러는 그 중에 자기 수용소의 유대인이 400명이나 포함된 사실을 알고 낙담했다. 이를 계기로 더 대담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쉰들러는 평소 쌓아둔 인맥을 총동원해 자기 공장을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의 브륀리츠로 이전해 군수품 생산에 집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베를린에 청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장이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된 유대인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해 허락을 받아냈다.
쉰들러가 브륀리츠로 데려갈 1,000여 명의 리스트는 1944년 10~11월 사이에 작성되었다. 브륀리츠로 가는 여정에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쉰들러 리스트의 유대인 남자 700명을 태운 열차가 브륀리츠로 가지 않고 300㎞ 떨어진 다른 강제수용소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들을 빼내 브륀리츠로 데려가기 위해 쉰들러는 또다시 강제수용소 소장에게 온갖 뇌물을 바쳤다.
여자 300명은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들을 태운 열차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직행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쉰들러가 보낸 뇌물이 위력을 발휘해 아우슈비츠에서 빼내졌다. 이렇게 해서 쉰들러 리스트에 올라 있는 모두 1,098명의 유대인이 살아날 수 있었다. 쉰들러는 브륀리츠 공장과 인근에 공장 부속 수용소를 건립하는 데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유대인 노동자들을 보살피고 먹여 살리는 데도 많은 자금이 들어갔다. 나치 친위대는 물론 공장 감시병들이나 관료들에도 엄청난 뇌물이 들어갔다. 

말년에는 ‘쉰들러 생존자’들의 도움 받으며 살아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로 전쟁이 사실상 끝나고 소련군이 수데텐란트로 밀려들어 왔다. 쉰들러 공장의 유대인 1,098명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쉰들러 부부는 나치당의 일원이면서 전쟁의 특혜를 입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쉰들러 부부는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가축농장 등을 운영했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자 1957년 부인은 현지에 남고 쉰들러만 독일로 돌아왔다. 부부는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쉰들러는 독일에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다.
그러던 중 1961년 이스라엘 대법원이 쉰들러를 ‘열방(列邦)의 의인’으로 선정했다며 이스라엘로 초청했다. ‘열방의 의인’은 이스라엘의 국립기념관이 나치 지배 아래서 절멸의 위협에 놓인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비유대인들에게 부여하는 호칭이다. 쉰들러는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쉰들러 생존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의인의 길’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나무를 심었다.
쉰들러가 ‘열방의 의인’이라는 칭송을 듣고 독일로 돌아오자 독일인들이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의 집에는 돌이 날아들었고 일부 언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언가를 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악한 양심의 소유자”로 매도했다. 말년의 쉰들러는 유대인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1974년 눈을 감은 후 시신은 유언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시온산의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
‘쉰들러 리스트’ 안에는 레오폴드 페이지라는 유대인도 있었다. 페이지는 종전 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죽 제품 장사를 하며 사람들에게 쉰들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귀담아듣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 호주인 소설가 토머스 커널리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2년 후 ‘쉰들러의 방주’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대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어 전 세계에 쉰들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50년 전,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의 점령지였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다

1429년부터 수백년 동안 독립왕국을 유지해온 류큐와(琉球) 왕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879년이다. 류큐 왕국은 일본과 대만 사이에 동서로 약 1000㎞, 남북으로 약 400㎞를 잇는 146개 섬으로 이뤄진 나라였다. 일본 본토로부터는 1000㎞나 떨어졌다.

일본이 독립국이었던 ‘류큐 왕국’을 강제 병합한 것은 1879년

‘류큐 왕국’은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자체 군대는 없어도 무역과 외교를 이용해 독립을 유지했다.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검색 사이트에서 ‘유구국’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국역 기준 367건이 나온다. 그중 하나를 예로 들면 “유구국 중산왕이 신하라고 칭하면서 예물을 바치고 포로 8명을 송환하다”(1392년 윤 12월 28일 태조실록)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던중 1609년 일본 사쓰마번(현재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 군대의 침략을 받아 첫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독립왕국의 지위는 유지해 외교와 해상무역으로 정치경제적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중국이 서구 열강의 놀이터가 되면서 류큐의 이런 외교 정책도 한계에 달해 결국 1879년 4월 4일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곧이어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공식 편입되었다. 그러나 류큐는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렇고 그런 존재 취급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 1일부터 3개월 동안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버려진 섬의 위상을 단적으로 일깨워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1만5000명, 일본 본토의 정규군은 6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인구의 30%인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처럼 많은 주민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은 미군의 본토 진격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일본 군부의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 오키나와 지도

일본 본토로부터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존재 취급받아

패전 후에도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과의 흥정 대상으로 삼아 오키나와 주민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미국이 1949년부터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건설할 때도 눈감아주었다. 1952년 4월 미일안보조약의 발효로 일본 본토가 미 군정에서 벗어나 독립할 때도 오키나와는 미국의 신탁통치 상태 그대로 두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키나와를 방치하는 태도를 취했다. 오키나와 주민은 본토 여행을 하려면 여권과 비슷한 신분증명서를 지참해야 했다. 그걸 들고 여행지 출입국 심사관에게 제출하면 ‘일본국으로의 귀국을 증명함’이라는 스탬프를 찍어주고, 돌아갈 때에는 거꾸로 ‘출국을 증명함’이라는 스탬프를 찍었다.
미군은 일본의 묵인과 방조 덕에 1953년 4월 토지수용령을 발동해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 이런 식으로 미군이 수용한 토지만 오키나와 땅의 13%가 넘었다. 게다가 1955년 9월 미군 병사가 6세 어린이를 폭행살해하는 등 미군 범죄까지 계속되면서 주민들의 분노가 층층이 쌓였다. 1960년대 들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이 본격화했을 때는 오키나와에서 B-52 폭격기가 베트남으로 발진하고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가 베트남전에 파병되는 등 오키나와는 미 군사력의 견고한 보루 역할을 했다. 그러자 베트남 반전운동과 맞물려 오키나와 주민들의 조국 복귀 운동이 더욱 거세게 전개되었다.
1964년 11월 발족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오키나와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에 오키나와 반환을 요구했다. 베트남전 개입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미국 역시 오키나와 문제를 마냥 외면할 수 없어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되 오키나와 기지는 그대로 존속시키고 일본에는 새로운 역할을 부담시켜 대아시아 정책을 재정비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런 가운데 1968년 11월 19일 베트남 폭격을 위해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에서 발진한 B-52기 폭격기가 핵무기 저장소 부근에 추락·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을 경악시켰다. 다행히 핵무기가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5만여명의 주민들은 1969년 2월 가데나 기지 앞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 강도를 높여나갔다. 미국은 오키나와 주민의 조국복귀 요구나 일본의 국민감정을 무시하고는 오키나와 기지 사용마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반환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일본 본토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악감정 사라지지 않아

오키나와 반환협정은 1971년 6월 17일에 조인되고 중의원(1971.11.24)과 참의원(12.22)을 통과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72년 5월 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자축하는 감격의 소리였다.
그러나 본토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악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1975년 7월 17일 오키나와를 방문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가 위령탑에 참배할 때는 2명의 오키나와 청년이 화염병을 투척하고 ‘황태자 오키나와 방문 저지’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으며 일장기 ‘히노마루’가 불에 태워지거나 하수구에 처박혔다. 1999년 11월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천황 즉위 10주년 기념 피로연에서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은 것도 일본 정부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2007년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 실릴 오키나와 전투 관련 내용 중 집단자결과 관련해 군의 명령 및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을 문부과학성이 변경하려 했을 때는 11만 명이 참여한 현민 대회가 오키나와 본섬과 낙도에서 개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교과서 왜곡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교과서에서 불편한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처럼 일본 본토의 차별에 반발해 류큐 독립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독립을 원하는 주민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다만 최근에는 중국이 오키나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언젠가 불씨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토분쟁을 벌이면서 과거 중국의 속국이었던 류큐 왕국을 일본이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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