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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4월 15일 (금) 00:26:12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100년 전,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초대 서기장을 꿰찬 것은 인류 대재앙의 시작

1924년 1월 21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모스크바 근교 고리키 별장에서 54세로 눈을 감았다. 뇌졸중이 공식 사인으로 발표되었지만 ‘철의 장막’이 늘 그러했듯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무성했다. 스탈린의 지시로 독약을 장기간 소량씩 투약했다는 독살설의 진원지는 스탈린과의 정치 투쟁에서 패한 레온 트로츠키였다. 최근에는 망명 때 걸린 매독에 의한 정신착란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레닌의 시신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 붉은광장 지하 영묘에 안치되었다. 레닌을 신격화할수록 자신의 위치도 탄탄해질 것이라는 스탈린의 계산이었다. 레닌이 죽기 전, 유력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자신의 입지를 과신한 나머지 당내 기반을 다지는 데 소홀히 하는 바람에 권력은 동갑내기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강철 같은 기질로 과업을 추진하고 레닌의 신임 받아

▲ 레닌(왼쪽)과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은 러시아 남쪽 변방 그루지야(현재는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루지야는 제정 러시아 땅이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심한 술주정에 난폭하기까지 해 아내와 아들을 습관적으로 구타했다. 스탈린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고 믿었고, 이런 심리 상태는 분노조절 장애, 복수욕으로 발전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교회 성직자로 키우려 했다. 당시 성직자는 가난한 집안에서 성공하는 지름길 중 하나였다. 스탈린은 어머니의 교육 방침에 따라 1894년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학과 역사에 심취하고 민족주의 시를 썼다. 당시는 제정 러시아 말기였고 체제 비판 소설은 학교에서 금서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금서들을 읽었고 그중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피를 끓게 했다.
스탈린은 1899년 마지막 시험을 남겨두고 학교를 떠나 마르크스주의자 집단에 가담했다. 당시 그를 지도한 이는 훗날 스탈린에게 처형된 레프 카메네프였다. 스탈린은 1901년 러시아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 1903년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와 멘셰키비로 갈라설 때는 소수파인 볼셰비키 쪽에 가담함으로써 레닌 쪽 사람이 되었다. 레닌은 1905년 12월 핀란드에서 처음 만났다.
레닌이 해외에서 망명 생활(1903~1913)을 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국내에서 볼셰비키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체포 7회, 유형 6회, 탈옥 6회라는 놀라운 투쟁 경력을 과시했다. 1907년에는 거금이 든 현금 수송 마차를 볼셰비키 조직이 강탈하는 ‘트빌리시 은행강도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해 레닌의 신임을 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지방의 일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12년 볼셰비키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진출했다. 그때부터 ‘강철’이라는 뜻의 스탈린을 필명으로 사용하고 프라우다에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등 이론적 기반을 다지면서 명성을 높여나갔다.

“스탈린을 서기장 직에서 축출하라”(레닌)

하지만 1913년 다시 체포되고 시베리아 오지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존재감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져 풀려날 때까지 오지에서 지낸 4년간의 유형 생활은 정치적으로 큰 공백이었다. 1917년 3월 당중앙위원으로 복귀했으나 그를 기억하는 대의원은 별로 없었다. 10월 혁명에서도 별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 후 강철 같은 기질로 주어진 과업을 추진하고 레닌의 신임을 받으면서 빠르게 당중앙의 한 가운데로 진입했다. 레닌은 스탈린의 충성심을 믿고 1922년 4월 3일 제11차 당대회에서 장차 권력 장악의 중요한 발판이 될 당 서기장을 맡겼다. 하지만 스탈린이 서기장을 무기로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는 것을 알고 평가를 달리했다.
레닌은 1922년 5월 25일 첫 뇌출혈을 일으켜 집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당 지도자들에 대한 비밀 평가를 측근에게 받아적게 했다. 이른바 ‘레닌의 유서’였다. 유서에는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너무 자만하다”고 되어 있고 “스탈린은 동지들을 무례하고 냉담하게 다루니 서기장 직에서 축출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당시 레닌의 병은 스탈린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래도 1923년 3월 말 개최할 당대회에서 유언장을 공개하려 했으나 대회 3주 전인 3월 10일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무렵 여론은 포스트 레닌으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을 꼽았다. 스탈린은 뒷전이었다. 따라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주요 정치국원들이 가장 우려한 상대는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였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3두 체제를 결성해 만일에 대비했다.

1934년 시작된 대숙청으로 20세기 최대 살육전 펼쳐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멀리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에 있던 자신에게 스탈린이 장례일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믿질 않았다. 내막을 알 리 없는 당과 인민이 트로츠키의 결례와 무관심을 질타하는 동안 스탈린은 장례를 준비하며 홀로 각광을 받았다.
문제는 레닌의 유언장이었다. 결국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스탈린은 비참함과 초라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을 변호하고 스탈린 자신도 짐짓 태연한 척 레닌 숭배를 강조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전방위적으로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트로츠키의 반(反) 레닌주의 증거로 혁명 전 레닌의 볼셰비키당 강령에 반대했던 트로츠키의 성명을 공개했다. 레닌의 숭배가 절대적이던 시기에 반 레닌주의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트로츠키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하는 것이었다. 결국 트로츠키는 1925년 1월 실각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스탈린의 다음 표적은 3두 체제의 두 축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결국 두 사람도 스탈린의 집요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26년 권력에서 밀려났다. 두 사람은 거세당한 트로츠키와 연대해 대대적인 반스탈린 시위를 계획했지만 곧 진압되었고 1927년 11월 당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경쟁자들을 모두 쫓아낸 스탈린이 추진한 것은 급진적인 농업의 집단농장화와 공업화였다. 집단농장화를 반대해온 부하린 등 당내 우파를 공격하기 위한 또 다른 전술의 일환이었다. 1928년 11월 우익의 견해를 비난하고 공업화 드라이브의 가속화를 촉구한 당중앙위의 결정 역시 스탈린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부하린 등은 현직에서 쫓겨나 공개 석상에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바야흐로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탈린은 전시 공산주의로 불리는 강력한 동원 체제를 가동하면서 1934년부터 대숙청을 벌여 20세기 최대 살육전을 펼쳤다. 


생가(生家) 터가 역사공원으로 조성되는 만해 한용운의 삶

충남 홍성군이 만해 한용운의 생가터(충남도 기념물 제75호)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용운의 일대기와 문학작품 스토리를 담은 조형물과 공원로가 조성되고 야외전시장, 생태습지, 체험휴게시설 등이 확충될 에정이다.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

▲ 한용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의 몰락한 양반 집에서 태어나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조혼 풍습에 따라 13살이던 1892년 결혼했으나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방랑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해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를 둘러보고 1903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태어날 무렵인 1904년 한용운은 26세 나이로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1905년 1월 출가했다. 190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머물며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동종의 대표와 친교를 맺고 일본어와 불교를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불교의 왜색화에 적극 반대하고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힘썼다.
강원도 건봉사에서 대중공양 중이던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승려들이 계속 공양하는 것을 보고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찰 정도로 항일 정신이 투철했다. 한용운은 1910년 가을 만주로 가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이회영·김동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유하고 애국 청년을 격려했다. 그러던 중 일본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아 독립군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관음보살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한용운은 왜색 불교에 적극 반대했다. 1910년 10월 친일 승려 이회광이 자신이 종정으로 있는 조선의 원종을 일본 조동종에 합병하자 전남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이회광을 종문난적, 법적, 매국매교자로 규탄하고 박한영·진진응 등과 함께 1911년 1월 조선불교 임제종을 창종했다. 한용운은 왜색 불교에 반대하면서도 승려의 결혼은 지지했다. 1910년 “승니(僧尼)가 혼인해 순산을 하게 된다면 불교의 교세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유효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냈다. 그러자 당시 정통 수행승들이 크게 반발했다. 오늘날 비구 승단인 조계종이 한용운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용운은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을 발간, 불교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일본 불교의 영향을 몰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부패가 만연한 당시 불교계에 큰 경종을 울려주었다. 200자 원고지로 1만 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불교 유신론’은 조선불교의 실상을 비판하고 개혁안을 제기한 실천적 지침서였다. 한용운으로서는 첫 인쇄출판물이고 한국 불교사에는 큰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1914년 4월에는 통도사의 고려대장경 6,802권을 현대적으로 정리한 800쪽의  ‘불교대전’을 펴냈다. ‘조선불교 유신론’이 불교의 혁신을 불교계에 호소한 것이라면 ‘불교대전’은 불경을 간소화하고 실용화해 승려의 교육과 불교의 대중화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이다. 한용운은 1917년 가을 백담사로 들어갔다가 12월 3일 밤 10시, 좌선 중에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오도(悟道)에 이르렀다. 1918년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을 창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 걷어차

한용운의 열정과 항일 정신은 3·1 운동에도 오롯이 배어있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대해, 항일 저항 정신이 약하다며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의견 충돌을 벌이다 마지막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독립선언문 기초에 참여했다. 하지만 공약 3장도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반론도 있다.
거사 직전에는 민족 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 원칙을 제시하고 3·1 운동 당일 독립선언서를 공표할 때는 식사(式辭)를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감옥에서 일부 인사가 불안에 떨며 대성통곡할 때는 똥물을 뿌리며 “울기는 왜 우느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호통을 쳤다. 한용운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19년 7월 53장의 ‘조선독립 이유서’를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50여 종의 독립선언문 중 신채호의 ‘조선혁명 선언’(의열단 선언)과 함께 대표적인 선언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언문은 감옥에서 몰래 빼내져 1919년 11월 4일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제25호 부록에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한용운은 1921년 12월 출옥 후에도 민족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훗날 지조를 꺾은 최남선이 길거리에서 그를 보고 반가워할 때 “최남선은 벌써 죽어 장사를 지냈다”며 쌀쌀맞게 외치며 돌아서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친일에 대해서는 추상같았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설립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가 창설되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신간회 발전에 열성을 보였다.

‘님의 침묵’은  한국 서정시에 길이 빛나는 기념비적 시집

한용운은 1926년 5월 한용운의 이름을 한국문학사에 굵게 새겨준, 한국 서정시에 길이 빛나는 기념비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시집에는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롯해 ‘알 수 없어요’, ‘비밀’, ‘첫 키스’, ‘님의 얼굴’ 등 88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세기 100년간 남북한을 통틀어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작가는 이광수이고 작품은 ‘님의 침묵’이라고 할 정도로 ‘님의 침묵’은 20세기 내내 우리 문학계의 화두였다.
한용운은 1933년 재혼해 딸을 낳았으나 일제하에서는 결코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딸의 이름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자신도 배급 대상에서 제외되어 가족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궁핍한 한용운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사람이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한용운을 위해 1933년 성북동 뒷산 자락에 팔작지붕 기와집 ‘심우장’을 지어주었다. 집을 지을 때 한용운은 마주 보이는 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집을 틀었다. 추운 겨울에도 조선 전국이 감옥이라며 심우장 냉방에서 꼿꼿이 앉아 지냈다.
한용운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으로 방응모의 고마움에 보답했다. 소설 ‘흑풍’(1935.4~1936.2)과 ‘박명’(1938.5.~1939.3)을 연재하고 1939년 11월부터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삼국지’를 번역·연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는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로 시작되는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를 지어 비통함을 달랬다. 한용운은 그토록 바라던 조국 독립을 결국 보지 못하고 1944년 6월 29일, 65세로 입적했다.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고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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