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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3월 14일 (월) 22:59:51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민음사 발간 <세계문학전집> 400권 중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가 최근 김수영 시인의 ‘시여, 침을 뱉어라’를 출간함으로써 세계문학전집 400권을 돌파했다. 400권 발간은 199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첫 책으로 낸 지 24년 만이다. 세계문학전집은 지금까지 35개국 작가 175명의 작품 318종을 소개했다. 판매된 책은 2000만 부를 넘는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2001년 5월 발간)이다. 105쇄를 찍으며 57만 부가 팔렸다. 샐린저는 어떤 인물이고 소설은 어떤 책인지 그 내용을 알아본다.

작가 생전에 3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6,000만 부 팔려 나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용이 단순하다. 그런데도 세월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은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2010)의 생전에 3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6,000만 부나 팔렸다. 이를 반영하듯 ‘20세기 영미 100대 소설’(1998년 미국의 랜덤하우스 출판사), ‘현대 영문소설 베스트 100선’(2005년 타임), ‘100대 명저’(2009년 뉴스위크)로 선정되었다.
샐린저는 미국 뉴욕에서 폴란드 출신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적 불량으로 중학교를 퇴학당해 육군 소년학교(1934~1936)를 졸업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펜시고등학교는 이 소년학교가 모델이다. 샐린저는 뉴욕대 등 몇몇 대학의 청강생으로 다니면서 소설을 썼다. 1940년 ‘젊은이들’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하고 ‘뉴요커’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2차대전에 징집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틈틈이 작품을 썼다. 1951년 3주 만에 쓴 ‘호밀밭의 파수꾼’(1951년 7월 16일 발간)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전후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 번 퇴학을 당하고 성적 불량을 이유로 네 번째 퇴학을 앞두고 있는 펜시고등학교 3학년생인 16살 홀든 콜필드가 2박3일 가출 기간 겪은 경험을 의식의 흐름 형식으로 그린 청소년 소설이다. 주인공은 어느날 학교에서 나와 뉴욕 시내를 방황하며 겪는 일상을 통해 어른 세계의 부조리와 교육계의 가식과 위선을 가차없이 꼬집었다. 그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어린 여동생 피비가 깨끗하고 맑은 사랑의 소유자임을 발견하고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게 안전하게 붙잡아주고 보호해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샐린저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소설은 거침없는 비속어와 냉소적이고 거친 언어로 가득하다. 줄거리까지 단순해 발간 초기에는 호평을 받지 못했다. 뉴욕타임스의 북리뷰는 “너무 길고 단조롭다”고 평했으며, 저속하고 천박하고 추잡하다는 비평도 적지 않았다. 청소년의 학교생활 부적응, 음주, 혼전 섹스, 동성애 등을 다뤄 소설을 금서목록에 올리는 학교도 많았다. 소설을 권장한 교사의 사임을 요구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러나 곧 주인공 홀든의 민감한 감수성과 결벽증을 통해 허위로 가득찬 사회와 삶의 이면을 조명하는 생생한 장면들이 독자들을 사로잡으면서 1950년대 미국 사회에 회의를 품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샐린저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 연구와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샐린저 현상’은 기성세대의 질서와 안정, 허위와 위선을 거부하는 일종의 정신적 운동을 뜻했다. 여기에 1959년 윌리엄 포크너가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고 격찬한 덕에 샐린저는 “20세기의 가장 문제적인 미국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을 일본어로 직접 번역 출간하고 자신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도록 했다.

기행의 연속… 세계적 명성에도 지독한 은둔생활을 고집

수십년 후에도 미국 저명인사들의 살해범 다수도 이 소설을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세를 탔다. 1980년 존 레논의 살해범인 마크 채프먼은 “모든 사람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 것이 내 소망”이라고 암살 동기를 밝히는가 하면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월드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저격 미수범인 존 헨릭도 이 소설을 좋아했다. 음모론을 다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컨스피러시’(1997년)에서는 주인공이 불안할 때마다 이 책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온다.
샐린저의 삶은 기행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은둔생활을 고집했다. 1953년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홀연 뉴햄프셔주 코니시에 정착한 후 인터뷰를 철저히 거부하고 외부세계와 담을 쌓은 채 지냈다. 신문과 잡지사 기자들이 수시로 찾았지만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제의도 거부하고 스티븐 스필버그도 문전박대했다. 그가 쓴 편지 내용을 끼워 제작한 ‘샐린저 전기’도 출판을 금지시켰으며 그의 사생활을 과장해 소개한 웹사이트는 소송을 통해 문을 닫게 만들었다. 허락 없이 원작을 모티브로 삼아 속편을 쓴 작가를 상대로 판매금지를 요구하는 법정 소송을 벌여 결국 미국과 캐나다에서 소설이 출간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기인 생활을 하니 그를 모델로 삼은 영화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영화가 ‘파인딩 포레스터(2001년)’와 ‘호밀밭의 반항아’(2018년)다.
샐린저는 은둔하면서도 여성 편력은 끊이지 않았다. 상대는 언제나 젊은 여성이었다. 1955년에는 19살의 하버드대생과 결혼했다가 1968년 이혼하고, 1972년에는 18살의 예일대 여학생과 1년간 동거했다. 작품도 발표하지 않아 1965년 단편소설 ‘Hapworth 16, 1924’ 발표를 마지막으로 죽는 날까지 45년 동안 단 한 편의 소설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15권의 소설을 써놓고도 “나 자신을 위해 쓴 것”이라는 이유로 발표하지 않았다. 샐린저는 평생 단 1편의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과 13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박종환 전 축구감독은 재산사기 당해 떠돌이 생활을 해도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의 영원한 주역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 신화’를 이끌었던 박종환(1938~ ) 전 국가대표 감독의 근황이 최근 전해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박종환은 최근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지인에게 여러 번 사기를 당하고 금융문제에 휘말려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심각한 좌절에 빠졌다”며 “비참하게 산다” “사는 게 엉망”이라고 토로했다. 박종환 감독의 삶과 청소년축구 ‘세계 4강 신화’ 당시를 되돌아본다.

세계청소년대회 예선 탈락했으나 북한의 난동 덕에 출전 자격 획득

대한민국 축구의 ‘4강 신화’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하지만 처음 싹을 틔운 것은 1983년 6월 2일 멕시코에서 개막한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였다. 한국의 청소년축구대표팀은 그 대회에서 4강에 올라 세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29년 동안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축구 변방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4강 신화’의 주역은 청소년축구 대표팀 감독 박종환이었다. 그는 1937년(호적상으로는 1938년) 황해 옹진에서 태어나 춘천고에서 축구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함께 축구선수로 활동한 춘천고 동기 중에는 훗날 대한민국 최고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이주일도 있었다. 박종환은 고교 졸업 후 신흥대(경희대)를 거쳐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나 선수로서는 화려하지 않았다. 이후 지도자로 뛰어들어 몇몇 고교 축구팀 감독을 거쳐 1976년 서울시청 감독으로 부임해 서울시청팀을 명실상부한 실업 최강의 팀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경기 중 한 번도 웃지 않는 감독, 선수들의 경기를 늘 차갑게 노려보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호랑이 감독이었고, 축구밖에 몰랐으며 가혹할 정도로 심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선수들의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성적이 좋아 1980년 청소년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고 1981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을 우승시켜 승부사적 기질을 지닌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박종환은 1983년 6월 2일 멕시코에서 개막하는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예선을 준비했으나 아시아 동부예선에서 중국과 북한에 져 멕시코 본선행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이 1982년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의 난동으로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된 덕에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에 대리 출전하는 행운을 얻었고 마침내 종합 1위에 올라 세계대회 출전 자격을 획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한축구협회 간부 중에는 이 행운을 거부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축구협회 부회장이 “나가봤자 망신”이라며 AFC 본선 티켓을 반납하라고 한 것이다. 박종환은 “허락 안 해주면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허락을 받았다.

세계 언론 ‘오리엔트 특급’, ‘붉은 악마’ 찬사 아끼지 않아

출전권은 얻었지만 당시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박 감독과 코치 1명뿐 스태프도 없었다. 선수들 각자 쌀 반 말과 반찬을 챙겨와 직접 식사를 해결했다. 조리사조차 없어 박종환 감독이 끼니마다 숙소의 주방을 빌려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다. 훈련 방식도, 대회 준비도 주먹구구인 건 매 한가지였다. 산소가 부족한 멕시코 고지대에 대비한다며 마스크를 쓰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훈련 중 호흡이 가빠 쓰러지는 선수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인권침해 이야기가 나올 상황이지만 그때 모두가 묵묵히 견딘 덕에 본선 멕시코전에서는 큰 효과를 보았다.
한국은 6월 3일 본선 첫 경기 스코틀랜드전에서 2-0으로 패했다. 그러나 홈팀 멕시코와의 2차전서 종료 1분 전 터진 신연호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고 3차전 호주와의 경기에서도 2-1 승리를 따내 세계를 무대로 한 국제축구대회 출전 사상 첫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멕시코전에서 4-2-4 포메이션으로 깜짝 승리를 따내면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벌떼 축구’라는 조어도 생겨났다. 전혀 예상치도 않은 승전보는 전국을 들끓게 했고, 일찍이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은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8강전이 벌어진 6월 12일, 온 국민이 일요일 아침의 늦잠을 포기하고 TV 앞에 모여 앉았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과시하며 겁 없이 달려드는 붉은 전사들에게 우루과이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양측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전후반을 1-1로 마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전반 14분. 김종부가 오른쪽을 돌파해 정확한 땅볼 센터링을 보냈고 문전에 기다리고 있던 신연호가 승리를 결정짓는 회심의 오른발 터닝슛을 성공시켰다. 2-1 승. 세계청소년대회 4강 신화의 달성이었다. 세계 언론은 한국을 가리켜 ‘오리엔트 특급’, ‘붉은 악마(Red Devils)’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6월 15일 4강전 상대팀은 세계 최강 브라질이었다. 김종부가 선취골을 성공시켜 전 국민을 열광시켰으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잇따라 2골을 허용해 1-2로 패하고 말았다. 폴란드와의 3~4위전에서도 1-2로 역전패해 4위에 그쳤다. 그러나 국민은 기적 같은 4위 입성에 너나없이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앞두고 인터뷰하는 박종환 감독

‘4강 신화’ 후, 국제대회에서는 승운 따르지 않았으나 국내에서는 승승장구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 후 박종환의 축구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1984년 LA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지만 지역 예선전에서 패해 올림픽 본선 진출 좌절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때도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준결승에서 쿠웨이트에 패해 아시안게임 2연패에도 실패했다. 이처럼 국제대회에서는 승운이 따르지 않았으나 국내 프로축구에서만은 승승장구했다. 성남 일화팀을 이끌며 1993~1995년 K리그 3연패의 금자탑을 쌓아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1996년에는 일화팀으로 아시아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해 AFC(아시아축구연맹) 선정 최우수클럽상을 수상하는 등 성남 일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박종환은 그해부터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6년 7월, 그해에 치러질 아시안컵과 1998년의 프랑스월드컵을 겨냥한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으로 참패하는 바람에 월드컵 사령탑도 물거품이 되었다. 박종환은 일부 선수들의 태업을 참패의 원인으로 유추했다. 입증할 수는 없었으나 당시 축구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소문이 있었다. 어린 청소년들과 달리 머리가 큰 프로선수들이 박종환의 혹독한 훈련방식을 참지 못하고 반발한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박종환 감독은 국가대표 출신의 스타 감독도 아니었다.
박종환은 이후 한동안 여자축구를 활성화하는 데 매진했다. 여자축구단의 단장을 맡고, 2001년 국내 중·고·실업팀이 모두 망라된 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2003년 대구시민의 축구단인 대구 FC 창단 감독을 맡아 2006년까지 지도했으나 예산과 선수 부족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그후 7년 동안 축구계를 떠나 있다가 2013년 성남시민축구단 초대 감독을 맡았으나 2014년 4월 선수 폭행 파문을 일으켜 자진사퇴 형식으로 축구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박종환에게는 ‘영원한 축구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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