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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50주년 맞은 우리 시대의 희망과 위로, '아침이슬'의 김민기
70년대의 상징, 그 살아있는 전설
2022년 02월 14일 (월) 12:34:41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젊은 시절, 캠퍼스 어느 구석에선가 그의 노래를 숨죽여 불러본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김민기가 '추억'이라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70년대의 역사'일 것이다.
광주의 경험을 가진 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은 '산 자여 따르라'라고 외쳤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70년대의 노래다. '나 이제 가노라'라고 읊조리던.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노래하는 이'였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연극 연출가, 기획자로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렇듯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50주년을 맞은 우리 시대에 던져진 희망과 위로의 노래,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 노래 이야기.

글 l 박성서 (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50주년을 맞은 위로와 희망의 노래‘아침이슬’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김민기 작사, 작곡, 노래)'

젊은 시절, 캠퍼스 어느 구석에선가 그의 노래를 숨죽여 불러본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김민기가 '추억'이라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70년대의 역사'일 것이다.

광주의 경험을 가진 80년대 이후 젊은이들은 '산 자여 따르라'라고 외쳤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70년대의 노래다. '나 이제 가노라'라고 읊조리던.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노래하는 이'였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연극 연출가, 기획자로 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렇듯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70년대 젊은이들에게조차 그의 실체는 가늠이 어렵다. 한동안 '금지'에 묶이고 '상징'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구전'의 문화로만 존재해왔고 그래서 그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현실'이기 보다 '신화'에 가까웠다. 자의건 티의건 간에 70년대 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해온 김민기의 노래 작업들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기록 중 하나다.

감시와 검열과 통제의 시대, 그러나 당시 금지곡 목록에 올려져 있던 김민기 곡은 '아침이슬' 단 한 곡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른 곡들과는 달리 아무런 금지 사유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만든 노래들은 일순간 방송에서 모조리 자취를 감춘다. 노래가 아니라 이름 자체에 금지의 굴레가 씌어 있었던 탓이다.

'우리나라 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대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의식 있는 젊은이' 김민기, 그는 경기중, 고 그리고 서울대 미대를 나온, 속칭 'KS 마크'였다. 이울러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 ‘명동 청개구리의 집’에서, 1970년. (옆)고등학교 시절의 김민기.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듀엣 '도비두' 시절의 김민기(왼쪽)와 김영세(오른쪽), 1970년. (아래)‘명동 청개구리의 집’ 개관 당시 김민기와 최경식, 1970년 6월 29일

김민기가 처음 만든 미발표곡, ‘가세’

비록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인 1967년, 그가 처음 만든 노래가 '가세'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노랫말은 이렇다.

1. 비가 내리누나/나 혼자 가고프나/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 그곳에/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쟎나.

2. 눈이 내리누나/나 혼자 가고프나/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가세 산 너머로 눈 그친 그곳에/저 군중들의 함성 소리 들리잖나.' -'가세(김민기 작사 작곡)'.

이어 만든 곡이 '친구'다. 이 노래는 고교 시절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동해안 여름 야영에 갔던 68년, 친구가 익사하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 안에서 자신의 심경을 그린 것이다. 이 노래는 이로부터 2년 뒤 서울대 시절, 동료 김영세와 듀엣으로 활동했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의 목소리에 실려 처음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그가 만든 노래들은 '친구'. '아침이슬'을 비롯해 ‘아하 누가 그렇게’, '작은 연못'. '길'. '그날' 등 매우 서정적이고 담백하다. 그저 일기 쓰듯 담담하게 노래했다. 때문에 당대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끌어냈던 것이리라.

그 자신 스스로도 "그저 '나의 작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렇게 불려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노래들이 금지된 것은 노래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관여한 실천적 참여활동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김민기 발표 음반들

연행 행로의 시작, ‘꽃피우는 아이’

그는 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그리고 '꽃피우는 아이'를 불렀다는 이유로 이튿날 새벽, 동대문서에 연행되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음반들은 모조리 압수당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그가 후에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후 야학이나 '금관의 예수(1973)' 소리굿 '아구(1974)' 등 가톨릭 문화 운동, 국악 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활동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의식 있는 젊은 한국인'이 한층 '줏대 있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유명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74년 군에 입대한 후 77년 제대하면서 '야인'으로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김민기에 대한 당국의 시각은 어떠했는가, 그 일화 중 하나. 김민기는 당시 모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관은 그에게 대외비 책자 한 권을 펼쳐 보였다. 그 책자에는 당시에 대학가에서 주로 불려 지던 과거 독립군가나 빨치산들이 불렀을 법한 류의 작자 미상의 노래들이 김민기라는 이름으로 적혀있었다.

이윽고 수사관은 '아침이슬' 부분을 펼쳐 보였다. 첫 낱말 '긴 밤'에 밑줄이 그어있고 '유신체제'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풀잎'. '이슬'. '태양'. '묘지'. 광야' 등... 단어마다 빨간 주석의 장황한 해설들.
그가 다그쳤다. '긴 유신체제의 밤을 끝내고 민족의 태양인 김일성을 열렬히 맞이하자'라는 내용이 아니냐는 거였다.

이 노래를 만든 것이 71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 김민기는 되물었다. "10월 유신이 몇 년도였지요?"
-이에 수사관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책을 큰소리 나게 탁, 덮었다.

'노래의 제 모습'과 ‘자신의 본 모습’을 찾다, 1993년 발표 ‘김민기 1~4집’

1971년 첫 독집음반을 발표했던 가수 김민기씨는 오랜 ‘금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22년만인 93년, 넉 장의 앨범 ‘김민기 1, 2, 3, 4집’을 동시에 발표하며 대중들 앞에 돌아온다.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음반을 냈다.’ 는 것이 당시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한 첫마디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 아울러 신비주의와 편견 등을 불식시키기 위해 처음 만들었던 악보 그대로 노래를 부름으로써 '노래의 제 모습'과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자 시도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그동안 구전으로만 알려졌던 노래들, 심의 반려로 음반화되지 못한 노래들, 왜곡된 채 발표된 노래들, 작사 작곡자가 다른 이름으로 표기되었던 노래들까지, 뮤지컬 형식의 긴 노래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노래 40곡을 한꺼번에 본인 목소리에 담아 발표했다. 자신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던 인물, 김민기씨가 비로소 노래로써 ‘고해성사’를 한 셈이었다.

이 음반은 그동안 ‘시대를 담은’ 그의 노래들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동시에 불행했던 한 시대를 극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당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그리고 당시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그 치열했던 기록의 장을 펼쳐본다. 그 일부. 

▲ 윤지영 독집음반 ‘고향 가는 길’과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양희은 앨범 초반과 일본에서 발매된 ‘금관의 예수’ 음반

김민기 노래의 치열한 기록들...

#. 혼혈아(1971년) -이 노래는 결국 ‘종이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같은 노래도 제목에 따라 심의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당시 현실.

#. 주여 이제는 여기에(금관의 예수,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도입부를 토대로 만든 노래.
‘금관의 예수’는 가진 자들에 의해 왜곡된 예수상을 비판하고 미중적 의미의 예수상을 구현한 노래로 1973년 원주가톨릭회관에서의 초연 당시 만들어졌다. 처음 양희은에 의해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제목으로 취입되었으나 금지가 되자 ‘주여 이제는 그곳(북한을 지칭)에’라고 제목과 가사를 바꿔 재취입했다. ‘여기’에서 ‘그곳’에 이르는 여정에 당시 한국 대중가요의 초라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 기지촌(1973년) -이태원 근처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제목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 없어 제목을 ‘황혼’으로 바꾸어 윤지영에 의해 발표(윤지영 독집-고향 가는 길, 오아시스 OL-1516, 1974년) 되었으나 그나마도 금지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이후 대학가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블루스풍의 멜로디가  기지촌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처음 윤지영에 의해 발표될 당시 '기지촌'의 제목은 '황혼'이다. 제목은 물론 가사까지 약간 다르다. 이 음반에 수록된 '황혼(기지촌)'의 가사이다.

1. 서산마루에 황혼이 물드네/누가 데려왔을까/창에 드리운 엺은 커텐 위로/아름답게 넘실거리네/나는 지금 황혼 속에 외롭지 않아/콧노래를 부르리라/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꾸려나/님이라도 와주려나/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아무것도 들리지 않네/아무것도 남지 않았네.

2. 강물 위에 황혼이 물드네/어디에서 왔을까/생각도 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내 얼굴도 적셔준다네/나는 지금 황혼 속에 꿈을 적시며/아무 데도 안 가려네/내일이 오면 무엇들을 보려나/슬픈 일은 없어야 하네/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아무 것도 들리지 않네/아무 것도 남지 않았네. -‘황혼(기지촌, 윤지영 노래)’

#. 강변에서(1973년) -가사 중 ‘16살 순이’가 ‘19살 순이’로 바뀌었다, 16살은 근로기준법 상 취업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공윤의 개작지시 이유. 허나 당시 주변에서 ‘16살 순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 하나이었다더라(1974) -공윤의 ‘심의 거부’로 음반화되지 못함.

#. 내 나라 내 겨레(1971년) -김민기 작사/송창식 작곡의  노래. 이 노래는 70년대 초, 경음악 평론가 이백천이 주도했던 'Campus Crusador(통기타 그룹들의 대학 순회 공연)'의 팀 송으로 불렸던 노래. 본래 이 노랫말 가사에는 1,2절 사이 간주 부분에 낭송이 들어있었다.

송창식이 이 노래를 처음 발표했던 앨범.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지만 1974년 ‘윤지영 독집음반/고향 가는 길’에서는 이 내레이션 부분이 김민기의 목소리로 실려 있다. 1993년도에 발표된 음반, ‘김민기’에서 역시 이 낭송 부분을 되살려 넣었다.

그러나 두 음반에서의 낭송 부분은 서로 다르다. 비교해보자면 먼저 윤지영 '내나라 내겨레' 낭송 부분은,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저 뜨거운 모래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찬바람 몰아치는 저 싸늘한 그곳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에 내일 찬란히 빛날 은빛 물결.' 이다.

반면 김민기 '내 나라 내 겨레' 낭송 부분은. '나의 조국은 허공에 맴도는 아우성만 가득한 이 척박한 땅 내 아버지가 태어난 이곳만은 아니다. 북녘땅 시린 바람에 장승으로 굳어버린 거대한 바윗덩어리 내 어머니가 태어난 땅 나의 조국은 그곳만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찢긴 철조망 속으로 스스럼없이 흘러내리는 저 물결, 바로 저기... 눈 부신 햇살을 받아 김으로 서려 피어오르는 꿈속 그곳, 바로 그곳...' 이다.

#. 고무줄놀이(1978년) -가사 중 ‘살 찐 송아지’ 부분이 ‘살 찐 강아지’로 바뀜.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공화당의 상징동물이 ‘소’였기 때문.

#. 잘 가오(1970년) -1970년, 이민 가는 친구의 환송회 자리에서 만들어 선물 대신 불러주었다는 노래다. 이 악보에 실린 2절 가사는 이 노래가 만들어진 훨씬 뒤인 77년,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박성현이 붙였다.

▲ 1993년에 발표된 김민기 1~4집

김민기는 93년에 발표한 음반에서 1절만 불렀고 윤지영 역시 1978년에 발표되는 ‘윤지영 노래모음’에서 1절만 부른다. 그러나 1974년에 발표한 윤지영 독집음반에선 2절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를 보자.

1. 먼 길 가는 친구여 이 노래 들으세/나 가진 것 하나 없어 이 노래 드리오/언제나 또다시 만나게 될는지/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2. 이제 떠날 먼 길을 그 누가 알랴/우리들 인도하신 그 뜻에 따라/언제나 또다시 만나게 될는지/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잘 가오(윤지영 노래)'

#. 늙은 군인의 노래(1976년), 상록수(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1977년) 등. -김아영 혹은 한규정, 양희은 등의 이름으로 발표. 이전까지 본인 이름으로 발표한 노래들은 이미 모두 금지되었고 아울러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 자체보다 작가 이름이 더 문제였으니 기막힌 심의 기준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각인되자 그는 아예 ‘빵에 갈 각오’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완성,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떳떳이 밝힌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을 모델로 노동자의 삶과 현실을 그려낸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로 내놓은 것. 결국 이로 인해 그는 또다시 연행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 더욱 위험한 인물로 간주,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 김제에서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1981년 이때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창작했다. 이 작품은 이후 1983년, 극단 연우무대를 통해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라는 제목으로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려진다. 문예회관 개관 이래 최대 관객동원을 기록했다.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 제작, 1987년 ‘아빠 얼굴 예쁘네요’ 출반, 노래극 ‘개똥이’, 그리고 1990년 한겨레신문사가 기획한 ‘겨레의 노래사업단’의 총감독을 거쳐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다.

‘아침이슬’, 금지곡에서 벗어나 음악교과서에 실리다

▲ 김민기씨와 인터뷰 당시 필자, 1993년

‘아침이슬’이 다시 방송을 통해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였다. 시대가 ‘투사’로 내몰았던 ‘김민기 노래’, 그 메시지는 어느덧 우리나라의 중심축에까지 작용한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2의 건국’을 외치는 정책 캠페인에도 그의 노래가 대신했다. 정부수립 50주년 TV캠페인 배경으로 깔렸던 노래가 바로 ‘상록수’였으며 메달권에서 탈락한 올림픽 대표 선수단 조기 귀국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노래 또한 ‘봉우리’였다.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아침이슬’이 본인의 애창곡임을 강조하고 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틴 루터킹 인권상 수상기념식 축가 역시 ‘아침이슬’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식 축가는 ‘내 나라 내 겨레’.

1993년, 본인의 육성으로 직접 나서 ‘고해성사’를 한 후 스스로 마이크를 거둬들인 ‘가수’ 김민기. 지난 2021년 12월 12일, ‘김민기 트리퓨트/아침이슬 50주년 헌정 콘서트’가 여러 후배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명곡’이라는 부제도 달렸다. 그걸 지켜보는 김민기의 심정은 어땠을까.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김민기[1][2](서울신문 2006년 12월 21일, 2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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