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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12월 08일 (수) 20:21:3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맬컴 X’ 암살범 중 2명은 범인 아닌 것으로 55년 만에 밝혀졌다는데… 맬컴 X는 누구

1965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X를 암살한 혐의로 복역했던 80대 남성이 55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뉴욕 맨해튼지검이 맬컴 X를 암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이듬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2명의 유죄 판결을 최근 취소했기 때문이다. 2명 중 1명은 1985년 석방되었고 다른 1명은 1987년 석방됐지만 2009년 사망했다.

지금까지도 증오와 갈등과 분노의 이미지 벗어나지 못해

1959년 7월, TV 다큐멘터리 ‘증오가 부르는 증오’에서 맬컴 X(1925~1965)가 “백인은 악마!”라며 증오와 저주를 토해냈다. 방송을 본 백인들은 물론 흑백통합을 주장해 온 흑인 민권운동가들까지 맬컴 X를 “흑인 파시스트”,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비폭력으로 흑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흑백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공민권 운동 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알고 있던 때에 “인종주의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을 포기할 수 없다”며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맬컴 X의 등장은 소수의 도시빈민 흑인들을 제외하고는 흑인과 백인 대부분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맬컴의 성장기를 생각하면 맬컴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고향 땅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백투 아프리카)’는 마커스 가비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던 침례교 목사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KKK단에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계 백인 외할아버지가 흑인 외할머니를 겁탈해 태어난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미쳐 정신병원에 갇혔다.
가정적으로 불우했던 맬컴의 성장기 역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여느 빈민가의 흑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9살 때 도둑질을 하고 13살 때 감화원 생활을 했으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에는 보스턴에서 나이트클럽 구두닦이, 접시닦이 등을 전전했다. 17살 때 이주한 뉴욕 할렘에서는 갱단에 가입하고, 마약을 팔고, 강도짓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946년 백인 가정집을 털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을 통해 ‘이슬람국가’라는 블랙 무슬림 단체를 이끌고 있는 엘리야 무하마드를 알게 되었다.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져들었다. 무하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술, 담배, 마약을 끊었다. 희미한 복도 불빛 아래서 지독한 난시가 될 정도로 책을 읽었다.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라

▲ 맬컴 X

맬컴은 1952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이슬람국가’에 가입하고 무하마드를 만나 깊이 감화되었다. 그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백인 냄새가 나는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맬컴 X’로 이름을 바꾸었다.
맬컴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호소력있는 스피치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다.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도 했다. 무하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이슬람국가’의 2인자로 천명했다. 1959년 TV 다큐멘터리 방송 후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되자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에 관해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해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미국이 온통 인종문제로 들끓고 있을 때 맬컴은 비폭력을 주창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조를 이루면서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은 통합을 통한 인종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그의 흑인민권운동은 소수의 인종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반면 분리를 통해 흑백문제를 해결하려 한 맬컴의 운동방식은 소수의 가난한 흑인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으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맬컴은 1963년 8월의 워싱턴대행진을 두고는 “얼간이 행진”, “백인광대와 흑인광대가 함께 출연한 소풍이자 서커스”라며 비아냥댔다. 킹에 대해서는 “백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20세기의 샘 아저씨”라고 조롱했다. 심지어 케네디의 피살에 대해서도 “자업자득”이라고 논평해 백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설과 폭넓은 지식 덕에 맬컴은 자주 매스컴에 등장하고, 그때마다 관심과 비난과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백인도 공존해야 할 ‘인간’으로 인식 바뀌어

인기가 치솟자 ‘이슬람국가’의 1인자 무하마드가 맬컴을 질시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위태롭던 둘의 관계는 1963년 7월 무하마드가 2명의 비서와 불륜관계를 맺어 4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틀어졌다. 맬컴의 투쟁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맬컴은 무하마드의 도덕성에 환멸을 느끼고 1964년 3월 공식적으로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슬람국가’와 결별을 선언했다.
맬컴은 1964년 4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순례한 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에게 백인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라 때로는 협력할 수도 있고 결국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인간’이었다. 백인들 개개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버리고, 마틴 루터 킹의 접근방식도 수단은 다르나 목표가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지순례를 계기로 맬컴은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바꾸었다. 회교사원을 설립하고 자신이 결성한 아프로·아메리카통일기구(OAAU)를 이끌면서 미 전역과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 간 평화를 역설했다. 그러자 ‘이슬람국가’ 측이 맬컴에 대해 공공연히 위협을 가했다. 무하마드는 “맬컴은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슬람국가’ 매체는 맬컴의 잘린 목이 튀어다니는 카툰을 실었다. 결국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의 오더본 볼룸에서 열린 OAAU 연설 도중 3명의 무하마드 조직원이 쏜 16발의 총탄을 맞고 40세로 절명했다. 변화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전에 쓰러져 맬컴은 지금까지도 증오와 갈등과 분노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가 미 상원의원에게 언급한 116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전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최근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만나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서 승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 조정, 러일전쟁으로 백척간두 위기로 내몰렸는데도 국제 정세에는 까막눈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어 조선의 상황이 백척간두의 위기로 내몰렸다. 그러나 고종은 22년 전 미국과 체결한,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제1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고종의 첫 대미 특사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04년 8월 특별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 그해 11월 미국 하와이로 출국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 대표 윤병구 목사와 함께 1905년 8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공식 외교 경로로 청원서가 접수되면 8월 10일 시작될 포츠머스 회담 의제로 올리겠다고만 말할 뿐 더 이상의 언질은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면담이 성공했다고 판단해 워싱턴 주재 대리공사 김윤정에게 독립청원서를 루스벨트에게 공식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친일로 기운 김윤정은 고종에게서 명령이 오지 않았다며 청원서 제출을 거절했다. 설사 청원서를 제출했더라도 태프트 장관이 이미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1905년 7월 29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주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에는 루스벨트의 큰딸 앨리스도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프트와 떨어져 중국을 거쳐 1905년 9월 미국 해군대장을 대동하고 약혼자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 고종이 보인 환대는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앨리스 일행이 지나는 큰길가에는 사람이 빽빽이 늘어서서 청홍의 장명등과 성조기를 흔들었다. 앨리스는 당시 상황을 “한국인은 슬프고 풀이 죽어 있었다… 고종과 황태자(순종)와 오찬을 했다. 열흘간 머무르는 동안 공식 환대가 지겨울 정도였다”고 주위 사람에게 전했다.
고종의 환대는 어떻게든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는 안간힘의 표시였으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미 작성되고 8월 말 ‘포츠머스 조약’의 윤곽이 잡힌 뒤였기 때문에 사실상 헛수고였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민영환, 이준, 이상재 등을 엘리스에게 보내 조선이 처한 현실을 루스벨트에게 호소할 특사 파견을 제의하게 했으니 국제 정세에 이런 까막눈도 없었다. 게다가 고종은 호머 헐버트를 대미 밀사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헐버트가 1905년 11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조선에서는 하루 전 이미 을사조약이 체결된 상태여서 헐버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반응도 싸늘했다. 루스벨트는 헐버트에게 외교 사항이므로 국무부로 가라면서 접견을 거절했고, 국무장관 엘리휴 루트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에드윈 모건 주한 미국 공사에게 공사관의 철수를 훈령하고 난 다음날인 11월 25일 헐버트를 만나주었으나 냉랭하게 대했다.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파견하고도 대미 교섭을 강화하겠다며 또다시 민영환의 동생인 주프랑스 공사 민영찬을 미국에 급파했다. 민영찬은 12월 11일 루트 장관을 만나 고종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민영찬이 루트를 만난 닷새 뒤인 12월 16일, 워싱턴 주재 대리공사 김윤정이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완용에게서 주미 한국공사관의 문서 및 그 밖의 재산을 일본공사관에 이양하라는 훈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루트에게 통보함으로써 모든 대미 밀사 교섭은 끝나고 말았다. 김윤정은 공사관을 일본공사관에 넘겨주고 귀국했다.

비밀에 부쳐졌던 회담 내용이 공개된 것은 1924년

사실 미국과 일본은 러일전쟁 초부터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다. 루스벨트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러시아가 미국의 중국 진출에 장애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일본의 이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면서 일본을 러시아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을 수만 있다면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러시아를 완패시켜 동아시아의 균형이 깨지고 일본이 동북아를 독점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런 미일 간 우호 관계 속에서 1905년 7월 27일 윌리엄 태프트 육군성 장관이 일본 도쿄에서 가진 가쓰라 다로 총리와의 장시간 비밀회담 끝에 밀약을 체결한 것이니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었다.
태프트는 가쓰라와 나눈 대화 내용을 ‘서로 합의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미국의 루스벨트에게 보고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비망록이 공식 조약은 아니더라도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충분히 획득했다고 믿을 만한 것이었다. 밀약의 주요 내용은 3가지였다.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떠한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일본 측이 제안한 일본·영국·미국 간 비공식 동맹에 대해 태프트가 미국 의회의 승인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밀에 부쳐졌던 회담 내용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년이 지난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닛의 논문에 의해서였다. 데닛이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비망록을 토대로 논문을 써 1924년 8월 미국 정치학회에서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닛은 태프트가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電文)의 제목이 ‘비망록’인데도 ‘비밀협약(secret pact)’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이라고 의미를 과장했다. 그러자 1959년 레이먼드 에스더스라는 학자가 데닛이 밀약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뺀 전문 내용들을 복원해 비망록임을 밝혀냈다.

▲ 윌리엄 태프트(왼쪽)와 가쓰라 다로

밀약을 둘러싼 두 가지 논쟁점

오늘날 이 밀약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지고 있다. 첫째는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의 의미가 협상 내용에 담겨 있느냐는 점이고 둘째는 밀약을 단순히 양국 고위 관료 간의 의견 교환 즉 각서나 비망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양국 간 법적 의무를 지닌 협정으로 볼 것인지 하는 점이다.
첫째 논쟁점에 대한 그동안의 정설은 한국과 필리핀을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 내용만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정황상으로 당시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미국은 필리핀을 미국이 실제적으로 점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군사력이 필리핀에 대한 야욕을 드러낼 것을 우려해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주어 만주로 관심을 향하게 함으로써 일본이 태평양으로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쟁점에 대해서도 양론이 팽팽하다. 밀약이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처럼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가장 먼저 조선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국가가 미국이라는 사실도 이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반면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협상 내용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미일 쌍방의 누구도 서명하지 않고 양 당사국의 구속 조항도 없기 때문에 단순한 대화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비망록 본문에 ‘다음과 같은 시각이 교환되었다’라고 씌어 있는 것도 조약이 아닌 각서의 근거라는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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