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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마로니에 가수, 박건의 삶과 노래[2]
2021년 10월 12일 (화) 13:23:09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엄지손가락(2019년) 등 최근까지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있는 가수 박건

“난 작곡할 때 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요. 내 머릿속에 이미 악기가 들어있으니까...”

하늘과 땅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가을, 그 사이의 공간에 풍요로움과 사라짐, 아름다움과 쓸쓸함... 이러한 상반된 감정들이 가득 채워지는 계절, 가을.

매년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쓸쓸한 휘파람소리와 함께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로 시작되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다.

주인공은 가수 박건. 1968년 ‘두 글자’에 이어 ‘사랑은 계절 따라’, ‘청포도 고향’, ‘봄이 올 때까지’, ‘잊고 살리라’ 등 분위기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60~70년대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다.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가창력의 주인공 박건 선생은 어느 덧 칠십대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활발히  무대에 서는 동시에 후배들을 양성하는 보컬트레이닝을 겸한 ‘박건 작곡실 & 가요교실’을 운영 중이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회, 그리고 한국원로예술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가요작가들이 많이 몰려있는 낙원동 송해길에서 거의 매일 만날 수 있다. 가수 겸 작곡가 박건의 삶과 노래, 그 두 번 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박건 발표 음반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멋쟁이신사 가수로 각인시켜준 DBS(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주제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 노래의 빅 히트를 계기로 박건씨는 본격적인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이후 ‘봄이 올 때까지’, ‘남과 북에서’, ‘떠나갔네’, ‘어머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974년 KBS 10대가수상을 수상한다.

1972년 신세기에 전속되면서 발표한 노래가 자작곡인 ‘봄이 올 때까지’. 이때 사용한 작곡가 예명은 ‘홍박건’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초라한 입술/낙엽이 지고 눈보라 치면 외로운 발길/찬란한 태양이 숨어버리면 별이 빛나고/어둡고 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는데/가실 길 없는 시련 꺼져라 멀리/두 손을 모아 기도드리는 초라한 가슴에/아픈 사연은 잊어버린다 봄이 올 때까지.’ -봄이 올 때까지(홍박건 작사, 작곡, 박건 노래.1972년)

이 노래 ‘봄이 올 때까지’ 음반 재킷에는 ‘신세기레코드 전속 기념음반’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정작 박건씨에게는 신세기레코드사에 전속된 기억이 없다. 아마도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작곡가 이름표기를 홍박건이라고 한 건 동료 작곡가 김희진씨가 평소에 장난삼아 부르던 이름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서 예명으로 사용했지요. 이 노래는 파생음(원음을 반음 올리거나 내린 음, 보통 ‘사이음’이라고도 함)까지 사용하는 등 나름 고심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70년대식 희망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악상이 그러하듯 상당한 가창력이 요구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10대가수상까지 거머쥐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이 무렵 후배 백양수(클래식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씨의 소개로 결혼에 성공한다. 상대는 9살 연하의 이혜신씨.

“나이가 한 죽(옷이나 그릇 등을 열 벌 묶어 세는 단위)이나 차이가 나요. 그러나 인상도 좋고, 키도 크고 특히 회갑잔치를 앞둔 어머니께서 며느리를 빨리 보자는 성화에 겸사겸사 서둘러 결혼했죠.”

나이가 무려 한 죽이나 차이가 났지만 속칭 ‘죽이 맞는다’는 속담처럼 부인의 내조 덕에 1남1녀를 둔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 (사진 위 좌측) 가요1세대 작사가 반야월 선생과 함께. (위 우측) 선배가수 명국환, 한명숙씨와. (아래 좌측) 작곡가 원희명, 박건, 작곡가 김왕래, 가수 나훈아씨와 함께. (아래 좌측) 죽이 맞는 동료, 코미디언 방일수씨와 함께

영국의 팝가수 톰 존스(Tom Jones)를 겨냥해 만든 노래, ‘떠나갔네’

그가 작곡한 노래가 처음 음반으로 발표된 건 이보다 1년 전인 1971년 11월이었다. ‘방주연 스테레오독집(오아시스, OL-988)’에 수록된 ‘철부지(방주연 노래)’. 처음 슬로우 템포로 만든 곡이지만 편곡 과정에서 빠른 템포로 바뀌었다. 편곡자는 이철혁.

작곡가로써 그는 네 가지의 이름을 사용했다. 박건, 홍박건, 홍진우, 홍몽룡 등. 각각의 이름으로 발표한 노래들을 살펴보면, 박건 이름의 경우 ‘철부지(방주연, 1971년-이하 가수, 발표연도 순)’, ‘떠나갔네(박건, 1975년)’, ‘빈자리(박건, 1977년)’, ‘기다리는 계절(하춘화, 1981년)’, ‘구로는 제2고향(설운도, 1983년)’, ‘언니야(최지선, 1989년)’ 등이다.

홍박건의 이름으로는 앞서 소개한 ‘봄이 올 때까지(박건, 1972)’, 그리고 홍진우라는 이름을 사용한 노래는 ‘농부의 아들(박건, 1977년)’, ‘너 뿐(박건, 1977년)’, ‘항구아가씨(김명희, 1982년)’ 그리고 홍몽룡의 이름으로는 ‘정일까 미련일까(박건, 1991년)’ 등을 발표했다. 이후 CD시대에 들어서는 ‘박건’이라는 가수 명을 작곡가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이중 그가 특히 아끼는 노래는 ‘떠나갔네’다. 아주 격정적인 슬로우록 템포의 노래로 영국의 팝가수 톰 존스(Tom Jones)를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다. 하지만 결국 박건 자신이 발표했다.

‘떠나갔네 내 곁을 말없이/떠나갔네 내 곁을 말없이/오지 않네 이제는 그 사람/오지 않네 이제는 그 사람/오~ 그 사람은 어데로 갔나/오~ 다시 와 주오/너만을 기다리는 나에게/그래도 내 곁에 아니 오면/난 외로워서 어이 살겠나.’ -떠나갔네(박건 작사, 작곡, 노래).

톰 존스를 겨냥해서 가사를 아예 영어로 직역해 악보를 만들었고 또 그가 소속된 영국의 음반사 주소까지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악보가 분실되는 바람에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이 노래에 유독 관심을 가졌던 대성음반의 이흥주 사장이 악보를 한 번 보자고 해요. 그래서 건네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분실했다는 거예요. 당시 복사가 쉽지 않았던 때라 원본 자체로 건넸는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 벌어진 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직접 우리말 가사로 취입했어요. 젊은 시절 열정을 담아 만든 심혈을 기울였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힛트레코드사를 통해 ‘빈자리’, ‘꿈이 아니면’, ‘젊은 욕망’ 등과 함께 박건 자신이 발표했다.

이 무렵 발표한 노래 중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곡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즈음에 발표한 ‘남과 북에서(임종수 작사, 작곡)’와 애틋한 사모곡, ‘어머니(조운파 작사, 임종수 작곡)’다.

‘목이 타게 그리던 잊지 못할 그 얼굴/이제 만나지겠지 남과 북에서/늙으신 부모님 그 옛날의 그 사람/내 모습을 잊었나/꿈속에만 그리던 잊지 못할 그 얼굴/이젠 다시 만나리 남과 북에서.’ -남과 북에서(임종수 작사, 작곡, 박건 노래 1972년).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 남‧북한이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 발표한 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 간 최초의 남북회담이 열린 이 무렵 가요계에서도 통일과 이산가족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 노래를 비롯해 ‘대동강 편지(나훈아)’, ‘녹 슬은 기찻길(나훈아)’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음 하나 편할 때는 가끔씩은 잊었다가/괴롭고 서러울 땐 생각나는 어머니/젖줄 떠나 자란 키는 당신보다 크지만/지금도 내 마음은 그 팔벼개 그립니다/지난여름 정든 고향 개울가에서/어머님을 등에 업고 징검다리 건널 때/너무나도 가벼워서 서러웠던 내 마음/아직도 나는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팔벼개 의지하신 야윈 얼굴에/야속하게 흘러버린 그 세월이 무정해/어머님이 아실까봐 소리 없이 울었네/아직도 그 한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조운파 작사, 임종수 작곡, 박건 노래, 1977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애틋한 사모곡인 이 노래는 이후 1986년 들어 최진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 ‘봄이 올 때까지’, ‘떠나갔네’ 등 박건 친필악보

‘오아시스 문예부, 박건 가요교실’ 문 열어 후배 가수 양성

대중들에게는 가수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굳혀져 있지만 현재 박건씨는 ‘박건 작곡실 & 가요교실’을 개설, 가수 지망생들을 지도하며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가 가요교실의 문을 처음 연 것은 1979년. 창신동에서 시작된 ‘오아시스 문예부, 박건 가요교실’이다.

“동료 작곡가 최남구씨가 하던 음악학원을 인수했지요. 이때 ‘가요교실’이라는 단어를 제가 처음으로 사용했죠. 당시 한국연예협회가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해 뽑은 신인가수들을 보컬 트레이닝 시키는 일을 주로 했어요. 약 2~3년 동안 열심히 했고 보람도 컸지요. 특히 이들이 이후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두 배로 기뻤고...”

그러나 한창 의욕적으로 이 일에 몰두하던 그는, 한순간 모든 작업을 중단한다. 속칭 ‘마로니에 스탠드바 분양 사기사건’ 때문이었다.

일간지 사회면을 뒤덮은‘마로니에 스탠드바 분양 사기사건’

이른바 ‘마로니에 스탠드바 분양 사기사건’이 터진 것은 1983년 6월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유령회사를 앞세운 사기단이 서울역 앞 화신빌딩 지하에 ‘마로니에’라는 스텐드바를 차려놓고 ‘3.5평 크기의 코너 하나만 임대하면 월수 1백만 원은 보장한다’고 선전하는 수법으로 신청자들의 돈을 받아 가로챈 것. 이들은 회사 이름도 아예 ‘마로니에’로 지었다.

사기단은 술집영업허가 조차 받지 않은 채, 마치 가수 박건씨가 직접 직영하는 것처럼 일간신문 등에 광고를 내고 분양 신청자들을 끌어 모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마로니에’ 대표 김 모씨는 ‘가수 박건씨가 회사 대표로 직접 경영하는 스탠드바라며 점포만 얻으면 숙련된 여자 바텐더를 고용, 책임지고 수익을 보장하겠다’고 속여 권리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가로챘고 점포마다 보증금 5백만원 씩 받은 후 잠적하는 수법을 썼다는 것. 이렇게 이들 일당은 총 267명으로부터 12억 6천만 원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처음 연예인들에게 접근, 이름만 빌려주고 무대 출연을 해주면 수익 중 일부를 월급으로 주기로 계약한 뒤 마치 연예인들이 대표로 분양, 영업하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국 이 회사의 대표 김 모씨가 구속되었고 애꿎은 연예인들은 모두 사기범들에게 이용당한 것이 밝혀지며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가수 박건씨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인기연예인들이었던 가수 고운봉, 영화배우 독고성, 탤런트 송재호, 코미디언 배일집 등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박건씨가 받아야했던 수모는 물론 명예 역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이후 이 사기극에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결국 박건씨는 연예활동에 의욕을 잃었고 그 후유증으로 모든 활동을 접었다.

사기 후유증 딛고 20년 만에 다시 문 연 낙원동,‘박건 작곡실 & 가요교실’

▲ (사진 위) 부인 이혜신씨와 제주여행 중. (아래) 딸 제경 양과 즐거운 한 때. 1970년대

이로부터 20년 후인 지난 2004년, 그가 낙원동에서 다시 ‘박건 작곡실 & 가요교실’ 문을 연다. 그리고 현재까지 17년 째 이곳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 사무실에는 열 살 터울의 막내 동생인 올갠 연주자 홍학희씨도 늘 함께 있다. 그는 주로 이곳에서 MR작업이나 편곡작업을 한다.

“음악을 하면서 새롭게 의욕이 생겨났지요. 예전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걸 꺼려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후배들의 지도하는 게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그 당시 선배들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는 이 작업실에서 많은 후배가수들을 키워냈다. 국악가수 안소라를 비롯해 ‘청양고추’의 강덕구, ‘노래방 데이트’, ‘처음처럼’의 김서원. ‘할렐루야’의 가스펠가수 김예소리, ‘내 고향 안면도’, ‘흔들리는 내 마음’의 나이영, ‘남은 행복’의 남두경, ‘꼭 한 번 만나고 싶다’의 양대승, ‘찬스’의 육기수, ‘익산역 부르스’의 윤태현, ‘You, You, You’의 이계석, ‘사랑해’의 이동이, ‘부끄럽지 않소’, ‘머드축제’의 이치랑. ‘대박’의 조혜림 등이 그들이다.

“저는 부드럽게 노래할 때와, 강하게 노래할 때를 구분되게 노래하는 스타일이에요. 대중들이 이해할지는 잘 모르지만 노래를 할 때는 음악용어 그대로 부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죠. 제가 어릴 때부터 음악학원을 다니면서 터득한 방법이죠. 때론 부드럽고 다정하게, 때론 강렬하게, 심지어 파생음까지 만들어 혼을 실어 노래해야죠. 물론 사람들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그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신곡은 ‘엄지손가락’이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을 자주 하다 보면 우리 모두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노랫말에 담았다. 2019년 10월에 발표되었다.

▲ 좌측부터 박건, 금사향, 명국환 선생, 그리고 우측이 필자(평창, 2013년)

“저는 곡을 만들 때 악기를 쓰지 않아요. 내 머릿속에 이미 악기가 들어있으니까...” 그는 일찌감치  음악학원에 다니며 청음공부와 함께 코르위붕겐(Chorubungen)은 물론 콘코네(Concone) 교본까지 터득했다. 그렇듯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선지가 없을 땐 숫자로 적기도 하죠. 음명으로 작곡을 하면 반드시 악기가 있어야 하지만 난 계명으로 작곡을 해요. 반음은 물론 플랫까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까...”

박건씨는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회, 그리고 한국원로예술인회 회장을 맡고 있고 또한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강조한다. “음악은 나의 전부나 마찬가지예요. 어떤 때는 애인도 되고 친구도 되고 또 고향도 됩니다. 무엇이든 다 되는 것이 음악이죠. 그래서 늘 행복합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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