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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渾沌) - 그 관용과 이해의 힘
이은주 한의사 / 생태주의 건강 성생활
2021년 10월 07일 (목) 12:54:37 이은주 한의사 webmaster@newsmaker.or.kr

인간의 문명은 ‘불의 문명’이다. 스스로 불을 조절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최후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다. 불이 아니라면 최고의 힘을 가질 수도 없었고,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룩할 수도 없었다. 원시적인 모닥불이나 횃불에서 시작하여 점차 내연기관, 전기, 핵융합 에너지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큰 문명’을 구축해온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인류에게 처음 불을 가져다 준 사람은 프로메테우스였다고 전해온다(실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든 신적 존재였다).

우리가 아는 인간의 문명은, 모르던 것을 이해하고, 어둡던 것을 밝게 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단정히 정돈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질서가 없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고, 글과 말로써 행동의 규범들을 기록하여 전파하는 것도 문명이 해온 일들이다.

그런데 문명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왔는가 하면, 부작용도 적지 않다. 밤을 낮처럼 밝히고 굽은 길을 곧게 하여 남보다 빨리, 남보다 크게 경쟁을 하다 보니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고유의 리듬이 깨져버렸다. 자연은 본래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돌아가는데, 인간만이 새로운 리듬을 구사하면서 자연생태와의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경쟁은 자연스런 욕망 이상의 욕망, 즉 탐욕의 산물이다. 그 결과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는 새로운 질병과 재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장자(莊子)>에 흥미로운 비유가 나온다. 북해의 왕과 남해의 왕이 중간지점에서 만났는데, 그곳은 혼돈(渾沌)의 나라였다. 혼돈의 왕이 두 왕을 융숭히 대접하자 두 왕은 혼돈의 왕에게 보답하기로 한다. 보답이란 받는 사람에게 아직 없는 것을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보답일 것이다. 두 왕은 상의 끝에 혼돈에게 칠규(七竅)가 없는 것을 생각하여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기로 합의한다.

칠규는 인간에게(머리에) 있는 일곱 가지 구멍을 말한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코, 그리고 입- 이 일곱 가지 구멍을 제대로 갖춰야 인간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혼돈의 왕은 (역시 혼돈이라서) 그것들이 명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이 역할을 분담하여 하루에 하나씩 혼돈의 왕에게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랬는데 7일째 되는 날. <장자>는 이렇게 결말을 짓는다. ‘칠일이 지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七日而混沌死).’    

칠규를 뚫어 온전한 모습과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왜 좋은 일이 되지 않고 죽음이라는 흉한 결과가 되었을까.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혼돈’이라는 말에 있다. 혼돈은 혼돈스러운 채로 온전한 것이다.

혼돈을 명료한 무엇으로 대체했을 때 혼돈은 더 이상 혼돈이 아니다. 그러므로 혼돈으로서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혼돈의 왕이 죽었다’는 말은 비유적이다.
혼돈은 본래 도(道)의 모습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다양한 창조설화에 지구 위에 생물이 등장하기 이전 최초의 상태가 흑암이며 혼돈(chaos)이었다는 설정에도 시사점이 있다. 그것이 존재와 ‘도’의 본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문명은 혼란이나 혼돈을 가만 두지 않고 무엇이든 명료하게 재단하고 판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는 듯하다. 개발하고 개척하여 물리적 질서를 만들 뿐 아니라, 시시비비와 손익을 명백히 가려서 관념적으로도 질서와 순서를 매기는 것을 당연한 목표로 안다. 인간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 많은 규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인간 스스로를 옥죄고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갈등과 분쟁, 다양한 스트레스와 새로운 질병들도 지나친 탐욕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사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 속에는 이러한 경계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인간이 현명해지는 것에 우려를 가진 신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과일을 먹지 못하게 했던 에덴의 주인도 그랬다. 단순한 진리, 단순한 정의감이 인간세계에 불화를 일으킬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정치의 계절이 온 탓인지, 주변에는 온통 옳으니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하는 논쟁이 시끄럽다. 대체 절대 옳은 것과 절대 그른 것이 어디 있을까. ‘의를 사모하는 마음’은 좋으나, 그것 때문에 형제자매, 이웃, 친구, 동료들과 목숨걸고 다툴 필요까지는 없다. 어제 옳았던 것이 내일은 틀리기도 하지 않던가. 모든 것을 품는(관용과 이해) ‘혼돈’의 깊은 지혜를 모두가 한번쯤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NM (이은주 대화당한의원장, 한국밝은성연구소장)

▲ 이은주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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