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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역사칼럼
제목 : 백년의 기록, 백년의 교훈
2010년 01월 11일 (월) 19:24:21 김정형 칼럼니스트 gorome@hanmail.net

2010년 1월부터 ‘백년의 기록, 백년의 교훈’을 연재합니다. 격동의 20세기 100년 동안 국내외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실과 사건, 문화예술적 변화와 과학적 성취 등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출간    1900년

   
▲ 1900-프로이드
20세기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담론화한 것은 20세기의 가장 큰 지적 혁명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비교될 정도로 ‘무의식’은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무의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이다. ‘무의식’을 토대로 그가 쌓아올린 정신분석학을 빼놓고는 20세기를 논할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20세기는 프로이트의 세기라는 말도 나온다. 프로이트는 1856년 모라비아(현 체코 공화국)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1873년 빈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할 무렵 유럽 지성계의 화두는 병리학이었다. 의학과 철학은 물론 신생 학문인 심리학 연구자들까지도 병리학에 관심을 보였다. 1885년 최면술을 이용한 히스테리 환자 치료로 유명한 프랑스 신경병리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의 만남은 프로이트가 평생동안 정신분석에 매달리고 매진하게 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최면상태에서 받은 의사의 지시를 깨어난 다음에도 무의식적으로 따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프로이트가 파리에서 샤르코의 지도를 받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최면술을 이용한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은 1887년이었다. 이때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빈대학의 외과의사 브로이어와 함께 펴낸 보고서가 ‘히스테리 연구’(1895)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정신분석학의 역사적인 출발로 평가받을 만큼 중요한 저작물로 꼽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최면요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효과도 지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그후로는 ‘자유연상 기법’을 개발해 임상에 적용했다. 이 방법은 환자를 편안하게 한 뒤 마음속에 떠오르는 욕망들을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이때의 ‘자유연상'은 프로이트가 평생의 연구테마로 삼은 ‘무의식’을 파악하는 주요 단서로 사용되었다. 프로이트는 인간행동의 저변에는 ‘무의식’이 깊게 잠재되어 있고 이 ‘무의식’이 개인의 의식적인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의식으로는 무의식을 인지할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덜 논리적인 사고와 행동 요소들이 무의식을 살펴볼수 있는 주요 단서라며 자유연상, 꿈, 실수 등을 단서로 들었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에게 ‘자유연상’을 유도하면 사람들이 주로 꿈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프로이트는 꿈 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를 끌어내고, 본질적인 것을 추출해 내고자 했다. 그것은 실증 불가능한 것, 보이지 않는 것, 무의미한 것, 한마디로 비합리적인 것을 해석해서 합리적 세계 속에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 무의식과 꿈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 1899년 11월4일에 출간된 ‘꿈의 해석’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생소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어떤 정치적 혁명 못지않게 인류사에 중대한 변혁을 몰고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초판으로 찍은 600부가 다 팔리는데 8년이나 걸렸을 정도다. 다만 출판사가 발행연도를 세기가 저물어 가는 1899년이 아니라 신세기의 개막에 맞춰 1900년으로 잡은 덕에 훗날 20세기를 열어젖힌 대표 저작물로 자리잡을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출판사의 혜안이 돋보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형태를 알아보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소한 실수나 농담, 실언 등에 주목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무의식적 소망의 한 표현이고 무의식적 태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 실수나 실언의 예들을 해석해 놓은 것이 그 유명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이다. 그는 이런 일련의 저작을 통해 의식은 빙산의 일부분이고 물 속에 잠겨있는 거대한 부분은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부분이라고 보았다. 결국 대부분의 생각 희망 기억 느낌을 포함하는 무의식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1905)를 통해서는, 성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모든 인간의 행동과 관계,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에세이’는 아이들까지도 성적 충동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 때문에 일반인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을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분?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초아(id)’는 무의식적이고 생물학적인 욕망으로, 존재목적이 충동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한다. 성적 본능과 공격적 본능이 이에 속한다. ‘자아(ego)’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격’과 같은 것으로, 환경에 합리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정신의 한 부분이다. 양심의 일반적 개념과 흡사한 ‘초자아(superego)’는 충족수단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충동의 충족을 억누르는 기능을 한다. 쾌락을 쫓는 원초아와 평화를 바라는 자아 모두를 제어하는 게 ‘초자아’이다. 프로이트가 다양한 저술을 통해 전통의 가치와 인습을 과감히 무너뜨리자 그의 주변으로 알프레드 아들러, 칼 융 등 당대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1908년 4월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열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일반인들에게 억압된 욕망, 아동의 성욕, 거세된 공포 등은 여전히 낯설고 혐오스러웠다. 유럽 학계로부터도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던 그의 이론과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차대전이 끝난 뒤였다. 참호전의 장기화로 흔히 ‘포탄 쇼크’로 불리는 스트레스성 정신장애로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192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가 전 생애게 걸쳐 정신분석학을 발견하고 개척하고 탐구하고 수정하는 가운데 점차 프로이트의 이론은 초창기의 종교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전파되었다. 지식인이나 예술가들도 알게 모르게 프로이트주의자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오늘날까지도 한쪽에서는 열렬한 찬사를, 다른 한쪽에서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20세기의 퇴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과학성과 거리가 멀다는데 초점을 맞춘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정신의학계는 물론 학계와 문화계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에 분개한다. 실증주의자들은 “유사종교만큼이나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며 혹평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이야말로 인간의 내적 욕망과 숨겨진 동기들을 파헤치는데 더할나위없이 유용한 틀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요한 것은 그를 추종하든 반대하든, 그의 주장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20세기의 전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지않는 분야가 드물다는 점이다. 20세기 지성사에 가장 굵은 획을 그은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다.

카네기, 철강회사 매각…기부의 본격화     1901년

   
▲ 1901-카네기
1889년 ‘북아메리카 리뷰’라는 잡지에 게재된 ‘부의 복음’을 통해, “인생의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부를 분배하는 시기”라고 강조한 사람은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1835~1919)였다. 그의 말처럼 카네기의 젊은 날은 오직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 숨가뿐 나날들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직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그야말로 먹고 살기 어려워 고향을 등져야 했던 부모를 따라 카네기가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것은 그의 나이 13세 때였던 1848년이었다. 공부도 포기한 채 피츠버그의 ‘앨리게니’라는 회사에서 그가 처음 맞딱뜨린 일은 하루 12시간 노동에 주급 1달러 20센트를 받는 실감기였다. 전보배달원과 전신기사를 전전하던 카네기의 인생은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피츠버그 책임자 토마스 스콧을 만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카네기는 개인비서 겸 전신기사로 일하면서 예의 성실성과 총명함을 인정받아 스콧이 승진할 때마다 함께 승진하며 중책을 맡았다. 철도산업이 막 기지개를 펴던 무렵 철도일을 배울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지만 1856년 스콧의 권유로 시작한 주식 투자야말로 카네기에게 최고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1859년 피츠버그 사무소의 책임자로 승진한 카네기는 회사 일을 하는 중에도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한편 키스톤 브리지 컴퍼니란 철도 교량 제조회사를 설립(1861년)함으로써 사업가로서도 첫 발을 내디뎠다. 영국의 산업이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곧 회사를 사직(1865년)하고 유니언 제철소를 설립(1867년)했다. 1872년에도 영국에서 강철의 산업적 잠재력을 깨닫고 돌아와 대공황이 한창이던 1873년 피츠버그에 미국 최초의 강철공장을 착공했다. 다른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각종 공사들도 중단되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공황이었는데도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에드거 톰슨 제철소’를 설립한 것이다. 1875년 9월부터 강철을 생산하기 시작한 ‘톰슨 제철소’에서 처음 생산한 것은 급증하는 철도 교통량에 맞춰 좀더 육중한 무게를 견딜수 있는 강철 레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잘 부서지고 높은 온도에 견디지 못하는 선철이 레일로 사용되고 있었다. 1892년 카네기는 자신의 소유 기업 전부를 ‘카네기 철강회사’로 통합시켰다. 이른바 ‘카네기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카네기 철강회사’는 곧 전미 강철 생산량의 50% 이상을 생산했고 미국의 주요 건물과 시설물에는 카네기의 강철이 사용되었다. 미국이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승승장구했던 ‘카네기 철강회사’의 역할이 컸다. 카네기는 돈을 벌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해내는데 탁월했으며, “자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는 묘비명이 말해주듯 가장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도 천부적이었다. ‘톰슨 제철소’라는 회사명도 카네기가 철도 레일을 팔고 싶어했던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사장이었던 톰슨의 이름에서 딴 것이고, 침대차를 팔 때도 경쟁이 치열해지자 상대 회사 사장에게 합병을 요청하며 제시한 회사명도 상대 회사의 이름인 ‘푸르만 차량회사’일 정도로 그는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상대를 감동시켰다. 노사간의 상생과 화해도 중요시해, 카네기가 회사 전면에서 일하는 동안엔 큰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다. “종업원과 고용주는 법 아래 평등하다. 종업원은 동지들과 짜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가난한 노동자일지라도 고용주와 동격”이라고 공표한데서 알수있듯 카네기는 그 무렵 미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찾아볼수 있는 탐욕스런 자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1892년에 발생한 홈스테드 쟁의는 카네기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 카네기가 아닌 다른 경영자가 홈스테드 작업장의 파업을 공장폐쇄로 맞서고 주방위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여명의 노동자가 죽고 60여명이 다치는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카네기는 비록 그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평소 ‘노동자의 친구’를 자처하던 카네기에게 위선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맞은 인생 후반기는 그의 계획대로 기부와 자선의 삶이었다. 1881년 스코틀랜드 고향에 도서관을 지어준 것을 시작으로 도서관 건립은 1919년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에만 3000여개, 영국은 물론 남태평양의 피지에 이르기까지 영어 사용국가에 300여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교회에도 8000대의 오르관을 기증했으며 1900년에는 현재의 카네기 멜론대의 전신인 카네기공과대를 설립해 학문의 진흥을 꾀했다. 그가 당대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1901년의 한 거래를 통해서였다. 2월26일 금융왕 J.P. 모건에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카네기 철강회사’를 매각해 받은 4억9200만달러가 고스란히 기부와 자선에 쓰여진 것이다. 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이 1억3000만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모건은 이후 카네기 철강회사와 자신의 다른 철강회사를 합쳐 자본금 10억달러의 세계최대 철강회사 ‘US 스틸’을 설립했고, 카네기는 그날로 사업에서 은퇴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날은 세계최대의 재벌이 탄생한 날인 동시에 세계최고의 자선가가 탄생한 날이기도 했다. 카네기는 수천만달러씩을 들여 카네기협회(1902), 카네기교육진흥재단,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카네기재단(1911) 등 자선단체를 잇달아 설립했다. 과학 문학 미술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카네기호를 띄워 항해지도의 숱한 오류를 고쳤으며 천문대를 세워 180여개의 별을 발견했다.  뉴욕 최대 연주회장인 카네기홀도 카네기의 자선기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다. 1919년 8월11일 눈을 감았을때 수중에 남은 돈이 2200만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그는 생전에 벌어들인 돈 전부를 아낌없이 사회에 돌려주었다. 


라이트 형제 인류최초 비행 성공     1903년
   
▲ 1903-라이트형제
1903년 12월17일 오전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마을 근처 킬데블 언덕. 하늘은 맑았지만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속 43km의 강풍이 언덕에 몰아쳤다. 언덕에는 18m 길이의 레일이 깔리고 레일 위에는 270kg의 동력비행기 ‘플라이어(Flyer)호’를 실은 활차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종석도 없는 비행기 안에는 32세의 오빌 라이트가 엎드려 있었고, 비행기 밖에는 그의 형 윌버 라이트(36세)가 초조한 표정으로 비행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곧이어 활차가 단궤(單軌)의 레일 위를 달렸다. 비행기가 공중에 떴을 때 오빌은 비행기를 수평으로 유지하기위해 애를 썼으나 비행기는 고도 3m를 넘지못하고 모래밭으로 주저앉았다. 12초동안 36m를 날아가 멈춰서고 고도 역시 3m에 불과했지만 인류사에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동력 비행기가 중력의 사슬을 끊고 하늘로 나는 인류의 오랜 꿈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그날 형제는 세차례 더 비행을 하고 마지막 비행에서는 윌버가 59초동안 255m를 날았다. 형제는 곧 아버지에게 “목요일 아침 4회 비행 성공, 신문발표 부탁”이라고 타전했지만 일부 신문만 이 사실을 보도했고 그나마도 부정확했다. ‘플라이어호’는 라이트 형제가 수년동안 쏟아부은 땀의 결정체였다. 자전거 제작과 수리를 주업으로 하는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나는데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1896년이었다. 독일의 글라이더 연구가 오토 릴리엔탈이 비행실험 중 추락사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난 뒤였다. 릴리엔탈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글라이더를 만들어 타고 하늘을 날았던 사람이다. 1900년 10월, 라이트 형제도 글라이더를 타고 나는데 성공했다. 1902년에만 1000여회나 글라이더 비행실험에 성공, 자신감을 갖게 된 형제는 1903년 여름부터 자체 동력을 갖춘 비행기 제작에 착수했다. 당시에는 무게가 가벼운 가솔린 엔진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스스로 필요한 엔진을 만들었다. 수냉식 4기통 엔진으로 12마력이었다. 1903년 12월14일에 시도된 첫 비행은 실패했다. 플라이어호가 공중으로 오르는 순간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 형제는 마침내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1904년 봄, 형제는 자신들의 비행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신문기자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플라이어 2호가 발진도 못하고 활주 레일에 멈춰서는 바람에 기자들은 첫 비행도 조작된 얘기라며 자리를 떴다. 형제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고 그 결과 그해 9월20일 최초의 선회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05년에는 플라이어 3호가 38분동안 45km를 기록할 만큼 ‘플라이어호’의 수준도 높아졌고 형제의 비행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06년 5월22일 특허번호 821,393호로 비행기 특허를 따낸 형제는 1908년 2월 미 국방성이 비행기를 2만5000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하면서 비행기 산업에도 뛰어들어 20세기 비행산업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러일전쟁 발발     1904년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4월17일 청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도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약을 조인한지 6일만인 4월23일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3개국이 요동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삼국간섭’을 일본에 통보했다. 일본은 분통이 터졌지만 아직 러시아와 일전을 겨룰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해 결국 5월5일 요동반도를 포기한다고 3국에 통보하지 않을수 없었다. 1898년 3월 러시아는 더 나아가 청국과 여순·대련만 조차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를 손에 넣었다. 일본의 언론과 국민들은 ‘와신상담’을 곱씹으며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러시아의 청국 압박은 계속되었다.
   
▲ 1904-러일전쟁(제물포 상륙 일본군)

1900년 청국의 비밀결사조직인 의화단이 봉기해 러시아가 건설중이던 하일빈~대련을 잇는 동청철도를 공격하자 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시베리아에서 만주로 밀고 내려왔다. 의화단이 진압된 뒤에도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은 일본으로선 상당한 위협이었다. 영국도 중국 경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만큼 러시아의 남하와 이로인해 자국의 권익이 침해되는 것을 우려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 1902년 1월30일에 체결된 영일동맹이었다. 말할것도 없이 이 동맹은 만주에 눌러앉아 한반도를 넘보던 러시아를 의식한 것이었다. 조약에는 중국과 조선에서 일본과 영국 어느 한쪽의 이익이 타국에 침범당할 경우 양국은 이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세계 제1의 군사대국 영국이 극동의 일개 소국과 대등한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 사실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임과 동시에 러일전쟁을 각오하고 있던 일본에 밝은 전망을 열어 주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1903년 5월 러시아가 압록강 상류에서의 삼림벌채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의주 남쪽의 용암포를 점거하고 조차를 강요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첨예해졌다. 양국은 1903년 10월 협상테이블에 앉았으나 동상이몽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러시아는 자국의 태평양함대가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나뉘어 있고 극동수비대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종착점으로부터 8000km나 떨어져 있어 병력과 보급품을 지원해 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공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협상을 끌었다. 1904년 2월3일, 협상이 또다시 결렬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2월4일밤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어 러일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이 러시아에 국교단절을 선언한 2월6일 아침 일본의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휘하의 함장들을 소집, 제물포와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함대에 대해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는 6척의 전함, 14척의 순양함, 35척 이상의 어뢰정 등으로 편성되었다. 2월7일 연합함대 소속 제4전투함대가 먼저 제물포로 향했다. 2월8일 오후 4시30분 이 함대가 제물포 앞바다 팔미도에서 2척의 러시아 전함과 포함에 포격을 가하고 2월9일 새벽 일본의 연합함대가 여순에 정박중인 러시아 태평양함대에 기습포격을 가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한 러일전쟁의 막이 올랐다. 개전후 영국은 동맹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켰지만 정보나 무기로 일본을 도왔다. 미국 역시 일본편이었다. ‘문호개방’을 외치며 중국의 이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만주침략이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일본을 좋아했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국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조선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2월9일 여순항을 봉쇄한 일본은 2월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 육군의 작전목표는 요동반도와 요양 그리고 봉천(심양) 점령이었다. 해군이 여순항을 봉쇄하는 동안 육군은 한반도에서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직접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대련·요양 방면으로 진격했다. 또다른 육군은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여순과 북쪽으로 연결된 철도를 절단하여 외부 연결 통로를 폐쇄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러시아의 보병 역시 대련과 여순 사이에 두 개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격렬한 공격에 처절한 방어였다. 여순전투는 5월30일 여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03m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 육군이 총공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다. 8월말에는 세계전사에 ‘20세기의 대전투 중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 요양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2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격전 끝에 패전보다 별로 나을것 없는 승전을 거두었다. 12월5일 일본군이 마침내 203고지를 점령하고, 그해말 여순항까지 점령하자 러시아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05년 1월2일 백기를 들었다. 203고지 공방전에서도 러시아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일본군도 6만여명이 희생되었다. 여순전투는 사실상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다. 여순전투를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 사령관은 두 아들을 모두 이 전투에서 잃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에 치욕을 느낀 노기는 종전후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전까지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천황의 말에 자살하지 않고 있다가 7년뒤 메이지천황이 죽자 천황의 장례식날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했다. 1905년 3월 양국은 봉천에서 또다시 대회전을 벌였다. 봉천전투에는 25만명의 일본군과 32만명의 러시아군이 격돌했다.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 봉천전투에서 일본군은 7만명이 희생되었고 러시아군은 9만명 희생에 2만명의 포로를 냈다. 게다가 일본군은 곤경에 처한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돕기위해 멀리 지구를 3분의 2바퀴나 돌아온 발트함대까지 5월27일 궤멸시켜 러시아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돌린 쾌거”로 평가하는 러일전쟁에서 외견상 일본이 얻은 것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의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 동양의 소국이 도전장을 낸 이 전쟁으로 일본은 세계 열강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킬수 있었다. 1905년 9월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양국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러일전쟁도 막을 내렸다.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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