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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을 준비도 필요합니다
2021년 05월 07일 (금) 22:58:17 이은주 한의사 webmaster@newsmaker.or.kr

코로나19로 인류의 생활 패턴이 급변한 가운데, 이 바이러스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자그마치 3백만을 넘어섰다. 미국에서는 이번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1, 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를 다 합친 수보다 많다고 한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유행병과 같이 한꺼번에 많은 인명을 잃는 사태가 벌어질 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수천, 수만 년을 반복해온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왜 여전히 껄끄럽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인가. 굳이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증한 인구(전후세대)가 노령기로 접어들고 있어 그만큼 사망의 증가는 잠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던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부정적인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죽음에 대한 담론을 구체화시키고 그것을 편히 맞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노력은 너무 부족했다. 생각해 보면 그 긴 세월동안 인간은 ‘안 죽을’ 방도를 찾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을 뿐 ‘잘 죽을’ 방도에 대한 고민은 현저히 부족했다. ‘안 죽을 연구’에 의해 평균수명은 근대 이전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죽음만큼은 아직도 순조롭게 겪어내질 못한다.
생로병사는 모든 생명이 겪어내야 할 삶의 과정이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전 과정이 순조로울 때, 비로소 일생이 순조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 죽을 연구에 비해 잘 죽음에 대한 연구가 훨씬 부족한 것은 왜일까.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를 꺼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그 두려움을 벗어나기도 더 어렵고, 합리적인 대비도 어려워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이 여러 어려움을 동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은 몸이 죽어가는 과정에서의 물리적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고, 익숙해진 것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누구나 혼자 떠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 또 남기고 갈 것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미련 같은 소소한 감정들이 따른다. 그러니 아직 닥치지 않은 죽음에 대하여 미리 상상하기를 회피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제 그 연구는 더 미뤄두기만 할 수 없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 그리고 잘 죽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연구가 학문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죽음학’ 또는 ‘생사학(生死學)’이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죽음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방면의 이론과 기술들을 모으고 발전시켰다. 임종보호(호스피스 케어), 애도, 죽음의 질, 유족의 상실감에 대한 카운슬링 기법 등등이 근래 30~40년 사이에 겨우 틀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만큼 여러 방면의 학문적 바탕, 즉 철학 종교 인류학 의학 생리학 심리학 예술 문학, 그리고 법학의 조언까지 종합적인 학제간 협력이 요구되는 융합과학이다.

그에 비해 특히 동양권에서 죽음에 관한 연구는 무척 부진했는데, 여기에는 유교 전통의 영향도 있다. 생사유명(生死有命), 즉 인간의 죽음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담담하고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삼년상이라든가 이후 제사로서 고인을 기리는 예에 대한 조언을 남겼을 뿐, 죽음 자체에 대한 방침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로가 귀신이나 죽음 이후에 대해 질문했을 때 공자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답한 것이 유교의 현세주의적 생사관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죽음마저 정복해보고자 했던 진시황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꿈꿨던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한번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안 죽기 위해’ 많은 인명을 대리 희생시키며 폭군의 이름을 남기기보다 선정을 베풀며 백성의 추앙을 받아 ‘잘 죽을’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면 후세에 성군의 명성을 남기지 않았을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죽어 이름을 남기지 않음을 마음 아파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관념적 윤리적 이해도 중요하지만, 당장 사람의 신체건강을 돌보는 한의사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더 중시하게 된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죽음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설사 죽을 위기에 처한 환자의 목숨을 살려내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 연장에 불과할 뿐이다.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학문적 담론들이 좀 더 활발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자들은 개인들이 아직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전에 미리 해두면 좋을 일들, 생전의 유언을 남기고, 임종에 가까웠을 때의 치료 방법(예를 들면 연명치료에 대한 입장 같은 것)이나 장례에 대한 자신의 바램을 말해두고, 재산이 있다면 그것을 분배할 원칙 같은 것에 대해서도 가족들과 미리 합의를 해두기를 권고한다. 그러면 갑자기 쓰러지더라도 죽는 순간 마음의 복잡함은 한층 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흔해진 시대에 느껴지는 어지러운 생각들을 이렇게 정리해본다. NM
[이은주 대화당한의원, 한국 밝은 성 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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