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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04월 10일 (토) 23:07:0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괴벨스는 독일인의 이성을 마비시킨 ‘선전·선동의 귀재’

최근 수개월 사이,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의 이름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거론된다.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향해 “괴벨스 같다”고 하고, 현직 검사는 문재인 정권을 향해 “나치 괴벨스가 떠오른다”라고 했다. 경희대 학생은 같은 학교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과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향해 “당신과 당신의 괴벨스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괴벨스 이름은 미국의 대선 때도 등장했다. 미국의 존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괴벨스 같은 존재다. 유권자에게 계속 거짓말을 반복해 이를 상식처럼 여기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런 주장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괴벨스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한미 양국에서 이름이 회자되는 것일까. 괴벨스에 대해 알아본다.

히틀러 처음 만난 날 일기에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써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천부적인 달변과 본능적인 선전 감각을 타고난 ‘언어의 마술사’이자 ‘여론 조작의 대가’였다. 무엇보다 1차대전 후 실의에 빠진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히틀러를 신격화함으로써 독일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전 세계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죽음의 전령사였다.
괴벨스는 독일 라인주의 소도시 라이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대퇴부에 앓은 골수염으로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굽고 성장이 지체되어 어려서부터 동정 어린 시선이나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 그 과정에서 생긴 열등감이 그 시절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고교 시절 발발한 1차대전 때도 다른 친구들은 다 군에 자원입대했으나 그만은 굽은 다리 때문에 입대하고 싶어도 입대할 수 없는 현역 불가 판정을 받아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친구들이 전선에 나가 있던 1917년, 본(Bonn)대에 입학,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계속된 가난으로 때로는 굶기도 했지만 장학금, 과외수입, 대출금으로 학업을 마쳤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8년 독일이 패전했다. 혼란한 틈을 타 공산주의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극우 세력은 퇴역군인들로 조직한 자유군단(의용군)으로 폭동에 맞섰다. 독일에 과중한 배상금을 강요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실업자들도 독일 전역에 넘쳐났다. 괴벨스 역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다락방에 틀어박혀 시, 자전적 소설, 희곡 등을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증오했다. 어렵게 드레스덴 은행에 취업했으나 9개월 만에 해고되었고 몇몇 신문사에서는 퇴짜를 맞는 등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지원했던 신문사 대부분이 유대인 소유였다. 괴벨스는 재능에 비해 과소평가되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었고 광적인 반유대주의로 기울었다. 그전까지 그는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대학 시절 존경한 교수도 유대인이었고 한때의 약혼녀도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이 그러했듯 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괴벨스는 본대, 뷔르츠부르크대, 프라이부르크대, 뮌헨대를 거쳐 1920년 옮긴 하이델베르크대에서  1921년 11월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는 괴벨스의 자존심을 크게 만족시켜 주었고 이후 괴벨스는 서명을 할 때 반드시 ‘괴벨스 박사’라고 적었다.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의 마음 흔들어

괴벨스는 1923년 11월 히틀러의 뮌헨 폭동 소식을 듣고 히틀러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절망하고 있던 많은 독일인은 혜성처럼 나타난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괴벨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소규모 우익정당인 독일민족자유당이 발행하는 ‘민족의 자유’지 편집원으로 들어가 1924년 10월부터 수개월 동안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히틀러는 1924년 12월 풀려나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 재건에 나섰다. 괴벨스는 1925년 2월 나치당에 입당했다. 당시 나치당은 이념적으로 ‘잡탕 정당’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당명부터가 ‘국가’라는 우익적 요소와 ‘사회주의·노동자’라는 좌익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괴벨스는 스스로를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해온 터라 좌익적 색채가 강했다. 반면 히틀러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세력과 자본가 계층에 접근했다. 괴벨스는 이런 히틀러를 비판하곤 했으나 기대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히틀러가 이런 괴벨스에게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은 1925년 7월 처음 만났다. 괴벨스는 당시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히틀러는 괴벨스를 호감을 갖고 지켜보았다. 결국 괴벨스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했다.
히틀러는 이런 괴벨스를 1926년 11월 베를린의 나치당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베를린의 정치 주도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괴벨스는 준군사조직인 나치돌격대를 동원하고 시위를 벌여 공산주의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곤봉과 몽둥이가 난무하고, 피가 튀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때의 투쟁에서 나치당은 패배했다. 괴벨스는 나치가 베를린에선 약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당분간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선전·선동 요원 양성에 치중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의 충성심과 복종심과 선전·선동 능력을 인정해 1928년 나치당의 선전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치당은 1924년 5월 총선에서 6.5%의 득표로 32석의 의석을 획득해 기세등등했으나 1928년 5월 총선에서는 득표율 2.6%에 의석수 12석으로 떨어져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지지 덕분에 괴벨스는 국회로 진출하는데 성공, 면책특권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를 공격하거나 노골적으로 공화국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소수당에 머물러있던 히틀러의 나치당에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1929년 말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경제난이었다. 나치당은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의 득표율로 107석을 얻어 일약 제2당으로 부상했다. 괴벨스는 1931년 이혼녀인 마그다와 결혼해 1945년 죽는 날까지 1남 5녀를 낳았다. 아내가 데리고 온 아들도 함께 살았다.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내각 안에 국민계몽선전부를 새로 만들어 3월 14일 괴벨스를 장관 겸 제3제국 문화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취임 일성으로 “선전부는 국민 정신의 함양에 관한 전권을 갖는다”고 공언하면서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호언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낙인찍기’ 수법과 ‘시체팔이 투쟁’에 능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 희생자들이 나오면 그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우고,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 폭력을 맹비난했다.
괴벨스에게 시급한 것은 언론장악이었다. 먼저 좌파 언론과 유대계 언론사들을 폐쇄했다. 3개이던 통신사는 국가 소유의 통신사로 통합했다. 편집인법을 제정, 그때까지 신문·잡지의 발행인이 지던 책임을 편집인과 나누도록 했다. 이를 통해 국가가 편집권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 괴벨스는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계에도 손을 뻗쳤다. 이른바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수만 권의 책들은 불에 태워 없앴다. 6000여 점의 미술 작품들도 퇴폐 미술작품이라는 이유로 공공미술관에서 철거하거나 몰수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특히 괴벨스가 동물적인 후각을 발동한 것은 시대의 총아 라디오였다. 1934~1935년 라디오 보급을 위해 국가보조금을 지급한 덕에 독일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라디오를 구매했다.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가리켜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영화도 괴벨스의 주요 관심 분야였다.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소재로 한 ‘의지의 승리’(1934)와 베를린 올림픽 기념 영화 ‘올림피아’(1938) 제작을 적극 지원해 대중이 부지불식 간에 전체주의의 늪에 빠져들도록 했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선전 책임자의 역할이 필요치 않아 권력 핵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으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고 전세가 역전되면서 다시 ‘선전의 대가’로 부활했다.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돕기 위해 괴벨스는 ‘가짜 뉴스’ 생산도 서슴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는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며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 활동을 강화했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 벙커와 요새로 숨어든 뒤에도 그만은 대중 앞에 끊임없이 나서는 용기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애인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기 전 괴벨스를 제국의 총리로 임명해 마지막으로 그의 충성심에 보답했으나 괴벨스는 5월 1일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독살한 후 자신도 독약 앰풀을 깨물어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영원한 심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괴벨스 부부의 시신 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렇게 괴벨의 흔적은 사라졌다.


美 탁구선수단의 중국 방문 50주년… ‘핑퐁 외교’의 시작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 이래 미국은 무역금지 등의 경제봉쇄정책으로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중국 역시 미국을 ‘흉포한 적’으로 간주해 양국 간에는 긴장상태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969년 초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고부터, 베트남전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 1969년 소련과의 진보도 충돌 사건 후 소련을 견제할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던 중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물밑 대화가 오가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美 탁구 대표단은 1949년 이후 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첫 미국인

양국 간에는 ‘중국 정부 ↔ 파키스탄 내 중국 대사관 ↔ 파키스탄 정부 ↔ 미국 내 파키스탄 대사관 ↔ 미국 정부’로 이어지는 루트를 통해 밀서가 오고 갔다. 그러다가 1970년 12월 “대만의 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닉슨 대통령의 특사를 환영한다”는 중국 측의 의지가 미국 측에 전달되고서야 물밑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경직된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민간 차원의 준비운동이 필요하다는 건 외교 원칙의 상식이었다. 먼저 중국이 1971년 초 모택동의 오랜 친구이자 ‘중국의 붉은 별’ 저자로 유명한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우를 초청했다. 미국은 1971년 3월 15일 그동안 금지해온 미국인의 중국 여행을 해제함으로써 관계 개선을 위한 미국 측의 적극적 의지를 중국 측에 알렸다. 나아가 일본 나고야에서 3월 말부터 열리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을 중국에 파견하고 싶다는 뜻도 중국에 전달했다.
미국의 탁구 대표팀 15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중국 북경 공항에 내린 것은 지금부터 50년 전인 1971년 4월 10일이었다. 이들은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국교도 없고, 서로 적대해 온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있고서야 국제 외교가는 미·중 간에 중요한 변화가 수면 아래에서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음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4월 13일 1만 8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탁구 경기에서 미국의 남녀팀은 각각 5대3, 5대4로 중국팀에 패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미국 대표팀 주장선수가 이달준이라는 한국인이었는데, 그는 중국의 정치 선전에 이용될지 모른다며 중국행을 포기하는 바람에 역사의 목격자가 될 기회를 아깝게 놓쳤다. 미국은 ‘핑퐁 외교’의 성공에 뒤이어 6월 10일 20년 넘게 지속되어온 대 중국 무역금지 조치를 해제함으로써 본격적인 화해 시대를 준비했다.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국제무대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

▲ 중국의 주은래 총리(왼쪽)가 미국의 키신저에게 베이징 오리구이 요리를 젓가락으로 집어주고 있다

마지막 정지 작업은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몫이었다. 키신저는 7월 3일부터 베트남과 태국을 방문하고 7월 8일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일정이었다. 그러나 7월 9일 오전 갑자기 “키신저 보좌관이 복통을 일으켜 그날 밤 계획되었던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공식 만찬회를 취소한다”며 “파키스탄의 수도 라발핀디에서 90㎞ 떨어진 산속 휴양지 나티아갈리에서 휴양할 계획”이라는 짤막한 성명이 발표된 뒤 키신저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휴양지에는 키신저가 미국에서 타고 온 전용기가 대기 중이었고 키신저가 탄 듯한 전용차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거리를 누비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잠행극이었다. 키신저는 그날 오전에 이미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중국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후 1시 쯤 북경에 도착한 키신저는 49시간 동안 머물며 20시간에 걸친 주은래와의 회담을 통해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따른 의견을 조율했다.
3일 뒤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키신저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목적지인 파리로 향했다. 키신저의 방중 사실이 알려진 것은 7월 15일 밤, 닉슨이 TV 생중계를 통해 “주은래의 초청을 받았다”며 “다가오는 세대의 평화를 위해 1972년 5월 이전까지 북경을 방문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한 뒤였다. 그리고 1972년 2월 21일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닉슨 미 대통령이 2만5000㎞를 날아가 북경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중국으로서는 23년 동안 설치해놓았던 ‘죽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국제무대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닉슨은 북경 중남해에서 모택동과 1시간 정도 만남의 시간을 갖긴 했으나 모택동이 너무 노쇠한 탓에 협상은 주로 주은래와 진행했다. 그 결과가 2월 27일에 발표된 ‘상해 공동선언’이었다.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 5원칙을 천명하고 장차 모든 미군과 군사시설을 대만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 선언의 골자였다. 관계 정상화를 기념해 중국은 판다 한 쌍을, 미국은 사향소를 전달했다. 그러나 미중 간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수교는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6년이 지난 1978년 12월 미국과 대만의 국교 단절이 있고서야 이듬해 1월 1일 중국과 공식 수교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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