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2.3 금 15:25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칼럼]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1]
6.25 전쟁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메카, 대구
2021년 01월 06일 (수) 19:49:3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대구 오리엔트레코드 설립자 이병주 선생과 인터뷰 당시 주고받은 친필 편지

머리, 양복, 구두를 전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 대구는 또한 전국 도시 중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서민의 술’을 즐기는 정 넘치고 전통을 중시하는 곳인 것이다.

대구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대구는 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지만 서울, 부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구 출신 가요인이나 노래는 적다. 대구에 세워져있는 대중가요 관련 노래비도 ‘비 나리는 고모령(현인)’, ‘능금 꽃 피는 고향(패티김)’, ‘빨간 마후라(쟈니브라더스)’ 그리고 새롭게 부각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정도다. ‘문화도시 대구’라는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셈이다.

그러나 한때 대구가 우리나라 가요계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을 이끌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사상 최악의 침체기였다고 평가되는 6.25 한국전쟁 시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던 탓에 음반 산업과 함께 공연이 꽃피울 수 있었다.

대구를 소재로 하여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 그리고 ‘노래 속에 나타난 대구사람’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 첫 번 째.

글 l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

▲ 작곡가 박시춘과 오리엔트레코드건물 2층에서 오리엔트다방을 운영했던 부인 김예비 여사

해방 직후인 1947년, 작곡가 이병주(李炳主, 1920년~2013년)에 의해 설립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대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가요계 인물들이 피란길에 올라 대구를 비롯해 부산으로 몰려왔다. 동시에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음반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오리엔트는 피란 연예인들의 사랑방이자 전쟁가요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작곡가 박시춘, 손목인, 이재호, 작사가 강해인(강사랑), 반야월(진방남), 손로원, 유호 등을 비롯해 가수 남인수, 백년설, 송민도, 이인권, 장세정, 현인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망라했다. 이들에 의해 ‘샌프란시스코’, ‘전선야곡’, ‘아내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미사의 노래’, ‘임 계신 전선’ 등이 전쟁 중에 오리엔트에서 탄생되었다.
.
특히 물자부족과 열악한 녹음시설로 인해 음반 제작 자체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 노래들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 노래들과 함께 우리 국민들은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고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중음악의 맥을 이어갔다. 이러한 대구 음반계는 1950년대 유니온, 서라벌, 아카데미로 이어지며 대구 음반계의 계보를 이어간다.

▲ 한국전쟁 당시 대구에 있던 오리엔트, 유니온레코드사에서 발매한 SP음반 레벨

해방공간에 탄생한 대구 오리엔트, 한국 가요의 맥을 잇다

1945년, 우리의 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된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말 그대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1946년 조선레코드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장비와 물자 부족으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이어 1947년 고려레코드사가 설립되었고 이어 조선, 서울, 아세아, 부산의 코로나 등과 함께 대구의 오리엔트가 그 뒤를 이었다.

고려레코드에서는 ‘가거라 삼팔선(남인수)’을 시작으로 소프라노 김천애의 목소리로 취입된 ‘애국가’가 나왔고 아세아레코드에서는 노랫말 속에 태극기를 등장시킨 ‘울어라 은방울(장세정)’과 ‘달도 하나 해도 하나(남인수)’가 나왔다. 그리고 뒤 이어 등장하는 럭키레코드는 ‘신라의 달밤(현인)’을 제1호 음반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대구에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설립된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곡가 이병주에 의해서다. 대구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병주는 6세 때 교회음악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7년 남선(南鮮)악기점(이후 ‘화정악기점’으로 개명)과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 이재호 작곡의 ‘귀국선’을 비롯해 가수 신세영의 데뷔곡 ‘로맨스 항로’ 등의 음반을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병주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이별의 탱고(현인)‘, ‘신라제 길손(남성봉)’, ‘쌍가락지 논개(남성봉)’ 작곡과 더불어 외국곡 ‘아마다미야(이남순)’를 편곡했고 ‘전선의 하룻밤(노래 방초양)’ 등 음반 취입 시에는 기타 반주를 직접 하기도 했다.

전쟁 당시 이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강남달, 고화성, 남성봉, 도미, 방초양, 신세영 등 신인가수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대구 종로에서 ‘옥경포목점’을 운영하던 갑부의 아들 신세영은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를 통해 등장하면서 심사위원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오리엔트가 발굴한 신인 1호인만큼 예명도 중요했다.

“처음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저에게 ‘신고산’이란 이름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나머지 심사위원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는 가운데 손로원 선생이 성씨만은 살려 ‘신세영’이 어떻겠냐고 제의했지요. 즉 신카나리아의 ‘신’, 장세정의 ‘세’, 이난영의 ‘영’자를 합친 이름이라며 이 이름을 쓰면 우리나라 최고가수가 될 거라고 치켜세웠어요. 해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시춘, 백년설, 손로원, 이병주, 이재호 등 일곱 분이 투표한 끝에 5:2로 ‘신세영’으로 결정되었죠.” 필자와의 인터뷰 당시 신세영 선생이 밝힌 일화다.

기대대로 신세영은 오리엔트의 간판스타로 발돋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 ‘귀국선(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을 취입했으나 녹음상태가 나빠 음반이 폐기되었고 이후 이인권에 의해 다시 취입되어 크게 히트했다. 또한 데뷔곡이 된 ‘로맨스 항로’ 취입 때는 새벽1시에 녹음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잡음이 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녹음하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고 회고했다. 그렇듯 당시는 노래 외적인 것들이 작용해 노래의 운명이 뒤바뀔 정도로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오리엔트가 가수 고화성의 ‘38선 야화’, ‘꽃 피는 진주 땅’ 음반을 취입,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한다. 가요계는 멈춰 섰다. 전쟁은 대한민국 가요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구 오리엔트가 50년대 초, 우리 가요를 대표하는 음반사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

▲ 가수 금사향의 ‘임 계신 전선’ 취입장면. 가운데 지휘하는 이가 작곡가 박시춘, 1952년

피난 시절 대구로 모여든 사람들, 피란민들을 달래준 전쟁가요들...

오리엔트가 우리나라 50년대 한국가요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1913년~1996년)의 가세였다. ‘애수의 소야곡’ 등 이미 많은 노래를 발표하며 우리나라 대표작곡가로 우뚝 선 박시춘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멈추지 않고 놀라운 창작열을 발휘한다.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다’라고까지 주장했던 박시춘은 만드는 노래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시대상을 적극 반영했다. 전쟁 직전 발표한 ‘가거라 삼팔선’을 시작으로 ‘전우야 잘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그리고 휴전 직후 발표한 ‘이별의 정거장’까지, 한국전쟁의 기승전결을 고스란히 노래에 담아낸 인물이다.

박시춘 선생은 1978년, 당시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나의 이력서’에서 전쟁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이 나자 대원과 가족들을 우선 군용트럭을 얻어 대구로 내려 보냈다. 1.4후퇴 때 선우휘 대위(이후 조선일보 주필)와 대전을 거쳐 대구로 철수, 대원들의 임시집합장소였던 키네마극장에 도착했다. 제주도로 기지를 옮길 제1훈련소 소장에 임명된 백인엽은 나를 군예대 대장으로 지목했다. 군예대원은 이미 선발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가수 김봉명이 주관했던 악극단원들이었다. 여기에 김화랑, 남인수, 신카나리아, 유호 등 몇몇 대원을 추가시켰다.

군예대 생활은 13개월 만에 청산했다. 유호에게 대장을 떠맡겼다. 그는 맡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다. 대구로 나왔다. 종군작가단에 입단하는 한편 화진동에서 오리엔트레코드사를 경영했던 이병주와 손을 잡았다.’

그렇게 박시춘은 오리엔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한동안 쉬었던 작곡을 재개했다. 여기에 대구로 피란 온 가수와 작가들이 가세했다. 이들은 오리엔트를 발판삼아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취입 활동을 했다.

이 전쟁 시기에 발표된 오리엔트 음반들을 통해 확인되는 노래와 주요 대중음악인들을 보면, ‘감격의 뉴스(손로원, 손목인, 심연옥 -이하 작사, 작곡, 노래 순)’, ‘거리의 천사(강사랑, 박시춘, 박신자)’, ‘굳세어라 금순아(강해인, 박시춘, 현인)’, ‘뉴 코리안(손로원, 손목인, 강준희)’, ‘님 계신 전선(손로원, 박시춘, 금사향)’,‘등잔불 소식(유호, 박시춘, 황정자)’, ‘미사의 노래(임영일, 이인권, 이인권)’, ‘바로 그날 밤(유호, 박시춘, 신세영)’, ‘병원선(손로원, 박시춘, 신세영)’, ‘사랑의 낙랑공주(강사랑, 이용준, 남인수)’, ‘샌프란시스코(손로원, 박시춘, 장세정)’, ‘아내의 노래(유호, 손목인, 심연옥)’, ‘옛 마을(김웅, 이병주, 백년설)’, ‘이별의 탱고(강해인, 이병주, 현인)’, ‘전선야곡(유호, 박시춘, 신세영)’,‘청춘무성(손석우, 손석우, 남인수)’, ‘추억의 사십계단(손석우, 토미, 신세영)’, ‘타향일기(손석우, 손석우, 신세영)’, ‘향수(김문응, 박시춘, 남인수)’ 등이다. 또한 육군군악대가 참여한 ‘애국가(김희조 편곡, 이영숙 노래)’와 ‘휘날리는 태극기(정동주 작사, 작곡, 이종운 이영숙 노래)’ 음반도 발견된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크게 히트했다. 특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작사가 강해인(휴전 후 강사랑으로 개명)이 당시 1‧4 후퇴 당시 기록영화 ‘흥남부두 철수 상황’을 보면서 만든 노래다. 여수 출신의 작사가 강해인은 박시춘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가 작사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김화랑, 신카나리아 부부가 창립한 호화선악극단에 의해 악극으로도 만들어져 같은 처지의 피란민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박시춘은 서울로 올라왔다.

▲ 대구 고모령(顧母嶺)에 세워진 '비 나리는 고모령' 노래비와 가수 현인과 작사가 유호. 현재는 고모령의 높은 산길이 많이 낮아졌지만 한국인이 넘어왔던 가파른 세월의 높이를 상징하듯 한국인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고개다. 1991년 고모령 입구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아래 사진은 작사가 유호 선생과 인터뷰 중인 필자.

오리엔트, 유니온, 서라벌, 아카데미... 대구 음반사가 우리나라 가요 맥을 이어

원로가수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당시 발매되던 음반의 반주는 주로 김광수 악단이 맡았다. 음반에 표기된 오리엔트관현악단, 오리엔트 하와이안밴드, 오리엔트 탱고밴드가 바로 김광빈, 최상룡 등의 김광수악단 멤버를 중심으로 구성된 악단들이다. 또한 클라리넷 연주자 엄토미가 이끈 토미밴드도 음반 취입에 참여했다. 기타의 손석우, 아코디언의 노명석을 포함해 김성천, 김창호, 이효춘 등 이후 국내 연주계를 이끌게 될 쟁쟁한 멤버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밤무대와 UN클럽 등에서 활동하다가 음반 녹음 때는 대구로 이동해 작업을 했다.

이때 녹음 장소로 주로 이용한 곳이 오리엔트 사무실 2층에 위치한 ‘오리엔트다방’으로,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부인 김예비(영화배우 김현숙으로도 활동) 여사가 운영하던 30여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당시에는 방음 시설이 열악해 바닥에 가마니나 볏짚을 깔고 창문마다 군용 담요를 두세 겹 얼기설기 엮어 방음장치 대용으로 사용했다. 음악인들은 비교적 주변 소음이 덜한 밤 시간을 이용해 녹음을 했다. 그마저도 전기 사정이 나빠 수시로 정전되기 일쑤여서 엔지(NG)가 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금사향은 ‘겨울이면 입이 얼까 봐 밤새 커피를 달고 녹음했다’고 회고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강준희, 나애심, 남성봉, 신세영, 이남순 등이 대구에서 첫 음반을 취입하며 1950년대 가요의 맥을 이었다. 오리엔트가 주기적으로 개최한 신인 콩쿠르를 통해 도미, 방운아또 다른 예명 방태원 등이 발굴되었고, 끝 무렵에는 남일해가 등장하며 오리엔트 출신가수들이 대구 가요계 인맥의 줄기를 형성했다. 이러한 추세는 SP 시대의 끝 무렵인 1958년까지 이어진다.

전쟁 시기 유니온과 서라벌레코드사도 대구에서 탄생했다. 유니온레코드사는 평양에서 조선 최대 규모의 악기점인 상신악기점을 운영하던 김철준, 영준 형제가 설립했다. 이 음반사에서 발표된 음반들로는 ‘내 고향 진주(손석우, 손석우, 남인수)’, ‘사랑춘추(손석우, 토미, 황정자)’, ‘선창아가씨(박금호, 백영호, 박재홍)’, ‘순정(강사랑, 김호길, 송민도)’, ‘피란일기(천상률, 백영호, 현인)’, ‘애수(한산도, 백영호, 송민도)’, ‘항구 에레지(손로원, 김호길, 현인)’ 등이다. 반주는 주로 토미와 그 악단, 또는 백운봉과 그 악단이 맡았다.

작사가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의 증언에 의하면, 1953년 서라벌레코드사의 설립은 대구 유니온레코드사의 공동운영자 김영준이 자본으로, 가수 백년설, 진방남, 작곡가 이재호 등 이른바 1940년대 ‘태평레코드 3인방’을 영입해 성사된 것이다. 서라벌레코드사는 ‘서라벌공연단’을 구성해 마산, 진해, 진주 등지에서 순회공연과 함께 신인가수 발굴 콩쿠르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서라벌에서 발표된 음반들로는 ‘다방아가씨(반야월, 김교성, 허민)’, ‘망향의 탱고(반야월, 이재호, 진방남)’, ‘방랑의 처녀(반야월, 이재호, 진방남)’, ‘야래향(반야월, 이재호, 심연옥)’, ‘천리여정(한산도, 백영호, 한종명)’, ‘해인사 나그네(반야월, 이재호, 백년설)’ 등이 있다. 그러나 서라벌레코드사는 설립 1년여 만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SP 음반만을 제작하던 오리엔트 역시 LP 시대로 전환되면서 문을 닫았다. 1960년대 들어 다시 등장한 오리엔트 이병주가 설립한 회사와 별개의 음반사, 아카데미레코드사가 등장해 잠시나마 대구 음반계의 계보를 이어갔다.

이들 음반사에서는 작곡가 이병주, 추월성, 작사가 호심, 그리고 가수 강남달, 김광남, 윤일로, 차은희 등이 주축이 되어 음반 취입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구기독교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 음반을 레코딩한 소규모 레코드사였던 아카데미 역시 10여 장의 음반만을 출시한 뒤 문을 닫았다. (계속)

[참고자료] 단행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박성서, 책이 있는 풍경, 2010년), ‘大邱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大邱’(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 2005년 겨울호).

▲ 대구 서라벌레코드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 (아래 사진)좌측부터 대구작가협회 전우정 회장, ‘바다가 육지라면’의 향토작사가 정귀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작곡가 황선우, 오리엔트레코드사장 이병주, 작사가 반야월, 할머니 가수 정귀동 여사, 가수 신행일, 맨 우측이 필자. 대구공원, 2005년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