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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0년 12월 07일 (월) 19:54:38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청록파 시인 조지훈 탄생 100주년

1939년 초 시인 정지용이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위촉된다. ‘문장’은 그해 2월 1일 창간한 월간 문학지로 이태준을 소설, 이병기를 시조 추천위원으로 위촉해놓고 있었다. 정지용은 그해 4월 조지훈(1920~1968)의 ‘고풍의상’을 시작으로 6월에는 박두진(1916~1998)의 ‘향현’과 ‘묘지송’, 9월에는 박목월(1915~1978)의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이다’ 등 신예작가 3명의 시를 2~3개월 간격으로 추천했다. 훗날 ‘청록파’로 불릴 3인의 신예 시인은 이렇게 자신들의 문재를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필명인 ‘지훈(芝薰)’은 ‘풀 내음 속에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는 뜻

▲ 조지훈

그러나 청록파는 곧 시작된 일제의 조선어와 조선 문화 말살정책으로 몇 편의 시를 추가로 발표한 것 말고는 우리말로 된 시를 더 이상 발표하지 못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40년 8월, ‘문장’이 1941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어 발표 지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말 문학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끊어지는 암흑의 동면기로 접어들었다. 시인들은 골방에서 몰래 우리말로 시를 썼고 그 시들은 감춰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이들 세 시인의 시에 주목한 것은 을유문화사의 조풍연 대표였다. 그의 눈에 세 시인의 시풍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아 보였다. 1946년 3월 당시 을유문화사에 근무하는 박두진이 경주의 박목월에게 “급히 상경해 달라”는 전보를 쳤다. 두 시인은 곧바로 조지훈의 집을 찾아가 공동시집 발간을 모색했다. 세 시인의 첫 만남이 있고 3개월이 지난 1946년 6월 6일 한 권의 시집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본향’, ‘순수 자연시의 발원’으로 평가받는 ‘청록집’이었다.
조지훈은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탁이나 ‘풀 내음 속에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훈(芝薰)’을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 그는 지사적 풍모를 지닌 민족시인이면서도 국문학, 민속학, 한국사 등 각 분야의 전통문학을 두루 섭렵한 국학 연구가였다. 일제강점기, 자유당 정부, 박정희의 독재정치 때마다 불의에 저항하는 지조의 삶을 살았으며 그 격랑 속에서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에게는 멋과 풍류, 기품이 서려 있었고 번뜩이는 재능과 막힘없는 교양, 추상같은 기개가 넘쳐흘렀다.
그의 올곧은 선비 정신은 가계에서 비롯되었다. 의병장을 지내다 한일합방 때 자결한 증조부, 고향 주민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다 6·25 때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부,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의 납북은 그대로 그의 삶에 투영되었다. 조지훈은 시대적 변화와 요청에 따라 시세계를 바꾸면서도 선비 정신만은 일관되게 실천했다.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자 한국 근대정신사의 거목

그는 10대 초부터 시인을 꿈꿨다. 1931년 마을 소년들의 문집 ‘꽃답’을 엮어내고 1935년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다. 1937년 상경해 문예잡지 ‘시원’사에 머물다 1939년 4월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했다. 1939년 4월 ‘고풍의상’, 11월 ‘승무’, 1940년 2월 ‘봉황수’가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당신의 시적 방황은 참담하구료”라고 평했다. ‘고풍의상’과 ‘승무’ 등은 한학적 교양과 불교적 가치관에 뛰어난 언어 기교를 보탠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1941년 3월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불교계의 거봉인 방한암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가 기획한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고 이후 월정사와 고향에서 지내며 꾸준히 시를 썼다.
해방 후에는 1946년 2월 경기여고 교사로 부임해 교가(김순애 작곡)를 작사했다. 1946년 9월 서울여의전 교수, 1947년 4월 동국대 강사를 거쳐 1948년 10월 고려대 교수로 부임해 고려대 교가(윤이상 작곡)를 작사하고 1952년 첫 시집 ‘풀잎단장’을 출판했다. ‘사상계’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자유당 독재를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4·19혁명 때는 한국교수협의회 시국선언문을 집필하는 등 개혁을 외치는 지식인·교수 그룹에 앞장섰으며 ‘혁명’, '잠언' 등의 시를 발표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었고 한국 근대정신사의 거목이었다.

 

정부가 미국 송환을 추진·검토한다는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의 전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최근 KBS와의 인터뷰에서 “푸에블로호를 평양에서 워싱턴으로 송환한다면 이것을 굉장히 적극적인 신뢰 조치로 받아들이고, 북·미 간 신뢰를 통해서 대화와 협상을 촉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1968년 1·21사태 때 남파되었다가 생포된 김신조씨는 “북한이 대동강변 전승기념관에 푸에블로호를 전시하는 목적은 남조선이 해방을 못 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데 미국이 결정적 장애물이 되기 때문임을 주민들에게 세뇌시키고 미국 첩보활동의 실체적 교육을 알리기 위한 선전물이기 때문에 어림없는 소리”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1ㆍ21 사태’에 이어 푸에블로호까지 나포되어 일촉즉발의 전운 감돌아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한 이른바 ‘1ㆍ21 사태’가 일어나 북부 수도권 일대에서 무장공비 토벌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경,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됨으로써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미 함정이 납치되기는 미 해군 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 사세보항의 미군 기지를 출발해 첩보 임무를 수행하던 푸에블로호에는 함장을 포함해 6명의 장교와 75명의 수병, 2명의 민간인 등 83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 1척과 초계정 3척 그리고 미그기 2기로 위협하는 북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1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1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원산항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푸에블로호는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미 육군이 화물선(850t)으로 건조했다가 1966년 미 해군에 인도되어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푸에블로호’로 명명되었고 1967년 5월 정보수집함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수년 전 비밀해제된 미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중앙정보국), NSA(국가안보국), 연방의회 등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1968년 1월 11일 오전 6시 큐슈의 사세보항을 출발해 1월 12일 오후 11시 30분 공해상인 작전구역에 도착했다. 첩보활동을 하던 1월 20일 오후, 3.6㎞ 전방에 북한 구축함이 나타나 잠시 긴장했으나 구축함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만 몰랐을 뿐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나포에 가장 유리한 지점인 원산 공해상에 진입할 때까지 조용히 뒤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1월 22일 아침 푸에블로호가 원산 인근 공해상에까지 접근하는 순간 마침내 작전을 개시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미 함정이 납치되기는 미 해군 사상 106년 만에 처음

그날 낮 12시에서 다음날인 1월 23일 오전까지 20여 척의 어선들이 주위에서 배회하더니 정오가 되자 사흘 전 공해상에서 만났던 북한 구축함이 다시 나타나 항복을 요구했다. 푸에블로호는 북한에 ‘공해상’이라고 응답했다. 실제로 그 지점은 북한 영토에서 16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공해상이 명백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푸에블로호의 약점을 간파하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쳤다.
그리고는 오후 1시 15분부터 초계함 3척이 더 나타나고 미그기 2기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1시 26분 북한이 발포하겠다며 총을 쏴대더니 1시 28분 푸에블로호에 강제로 승선하겠다고 통보했다. 푸에블로호는 발포 사실 등을 본부에 긴급보고하고 일부 무전기와 비밀문서를 파기했으나 제대로 하지 못해 비밀문서의 90%, 약 8000통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북한 수중에 넘어갔다.
푸에블로호는 ‘원산항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급박한 보고를 무전으로 쳤다. ‘북한의 발포로 3명이 부상당했으며 그중 1명은 다리가 날아갔다. 무기는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으로 끌려간 것은 일몰 전인 오후 5시였다. 우리 정부가 미국 측으로부터 나포 사실을 공식 통보받은 것은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에 도착하고 1시간 30분 뒤인 오후 6시30분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군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북한

푸에블로호 나포 후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은 미군이 자국의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원산항으로부터 40㎞ 지점의 공해상에서 납치되었다며 북한 측의 불법적인 군사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군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북한이었다.
사건 발생 후 미국은 푸에블로호 납치를 ‘전쟁행위’로 규정해 때마침 일본에 와 있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1월 24일 밤 원산 앞바다로 급파했다. 25일에는 미 전투기 2개 대대가 한국으로 날아왔고 26일에는 존슨 대통령이 공ㆍ해군 예비역 소집령을 내렸다. 우리 군도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비록 고문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푸에블로호 함장이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승무원 공동의 이름으로 영해 침범을 사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했다. 1월 27일에는 “미국이 무력행위를 한다면 푸에플로호 승무원들을 모조리 처형할 수밖에 없다”는 북한 최고사령부의 경고가 발표되었다.
미국은 다각도로 북한을 압박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맞바꾸기 위해 북한 선박을 나포한다거나 원산 공군기지 등을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심지어 비무장지대 북쪽 10㎞ 지점에 있는 북한 6사단 본부를 점령ㆍ파괴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당시 CIA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기를 출격시켜 북한 전역, 특히 군사기지에 대한 정밀사진을 촬영한 것도 바로 북한공격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 푸에블로호

 박정희 대통령, 미북 회담 반대 입장 고수

문제는 베트남전과 더불어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였다. 당시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그 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고 미국인들은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푸에블로호 나포 8일 뒤인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의 이른바 ‘테트(구정) 공세’로 미 전역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베트남의 100여 개 도시와 마을들이 8만여 명의 베트콩으로부터 동시 공격을 받은 것이다. 민간복장을 한 수천 명의 게릴라들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해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 남베트남 정규군 사령부, 대통령궁 등 주요 시설을 잇달아 공격했다. 이런 마당에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울며 겨자먹기 식의 협상뿐이었다. 2월 2일, 미ㆍ북 간의 비밀회담이 판문점에서 시작되면서 길고 지루한 협상의 서막이 올랐다. 인질을 붙잡고 있는 북한의 요구는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회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한 1·21사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국의 푸에블로호 사건만 해결하려는 데 급급해 하는 미국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군사 응징을 강하게 요구했다. 나아가 한국만의 독자적인 무력 보복을 천명하며 미국의 존슨 행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안보 및 방위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한다는 요지의 친서를 보내 박 대통령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1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한미방위조약 개정 등을 얻어내는 실리를 취했다.

미국,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서 정탐행위를 했다”고 시인

미·북 간의 협상은 북한이 첫날부터 “미국이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진전을 보지못하고 11개월 동안 28차례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양측이 석방 합의 문건에 서명한 것은 12월 23일 오전 9시였다.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1구의 시신은 서명 후 바로 미 측에 인계되었다. 사건 발생 336일 만이었다.
미국은 문건을 통해 “미국 함선이 북한의 영해에 들어가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하여 사과하고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북한의 영해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을 다짐한다”며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서 군사적ㆍ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했다”고 시인했다.
서명에 앞서 미국은 북한과 사전에 합의한 대로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승무원 석방을 위해 문건에 서명한다”는 옹색한 구두 변명의 기회를 가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날 북한 중앙방송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돌려주지 않았다. 원산항에 보관하다가 1999년 화물선으로 가장해 남한 주변의 공해를 9일간이나 돌아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 일반에 전시 중이다. 그곳은 사건이 일어나기 122년 전인 1886년 조선의 개방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쇄국정책에 의해 격침된 곳이었다.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셔먼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 당시 노동신문의 기사내용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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