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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0년 11월 08일 (일) 02:02:5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400년 전(1620년) 11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미국 땅을 밟은 영국 청교도들의 수난과 미국 정착史


암흑이었던 중세 유럽에 종교개혁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외견상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영국에서도 존 위클리프 등의 개혁 바람과 대륙에서 거세게 밀려드는 인문주의 물결을 타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영국 전역에 울려퍼지고 있을 때 헨리8세 국왕이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교황에 반기를 들었다. 헨리8세는 자신이 로마 교황을 대신해 영국 교회의 최고지도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을 발표했다. 이 법으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황에게서 독립하고, 영국 왕을 수장으로 한 국교회가 1563년 세워졌다.

영국 청교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

국교회는 그러나 기존 가톨릭의 의식과 교리를 상당 부분 수용해 가톨릭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열렬한 개신교들이 국교회를 비판하고 개혁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교도(Puritan)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봉건적 교회 질서 타파와 도덕적 신앙적 순수함을 추구했다.
그러자 영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국교회가 청교도를 박해했다. 청교도 중 일부는 국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신앙을 유지했다. 그러나 청교도의 개혁적 염원만으로 그 견고한 교회체제와 정치체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회와 정부의 박해가 날로 심화되어 경제적 제재와 투옥으로 이어졌다.
결국 윌리엄 브루스터(1567~1644)를 주축으로 한 일부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교회개혁을 포기하고 별도의 새 교회와 새 사회를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엘리자베스 여왕 밑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브루스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하자 일단의 청교도들이 그를 따르기로 했다.
그들은 160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레이던에 정착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여기에 네덜란드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이질감까지 더해져 당초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신앙사회 모델이 한계에 부딪히자 새로운 계획을 구상했다.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들은 1620년 미국의 버지니아 개발권을 독점하고 있는 영국 회사로부터 버지니아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미지의 땅에 정착하기 위해 문명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달리 대안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신앙적 삶의 완성을 향해 신대륙으로 떠나기로 하고 일단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20년 7월 22일 120명이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에서 ‘메이플라워호’와 ‘스피드웰호’에 탑승해 대서양 횡단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피드웰호가 잦은 고장과 사고로 회항하면서 출발이 지연되었다. 이때 항해의 불편함과 고통에 기진맥진한 사람 20명이 탈락했다.
그후 1620년 9월 16일(당시 영국이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9월 6일)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단독으로 영국 남서 해안 데번주에 있는 항구도시 플리머스항에서 출항했다. 102명 중 청교도는 41명이었고 식민지 회사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 모집한 사람들과 용인 등이 61명이었다. 선원은 25~30명 정도가 되었다. 이후 무게 120t, 길이 27.5m의 목제 범선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 청교도들을 ‘순례자의 시조들’(Pilgrim Fathers)이라고 불렀다.


▲ 메이플라워호 모형선박. 영국에서 고증을 거쳐 1957년 복원한 뒤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메이플라워Ⅱ’라고 명명했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출발해 신대륙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은 우연

우렁찬 찬송과 기도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두 달을 항해했으나 육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온갖 비바람과 거친 파도는 그들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탈진시켰다. 도대체 아메리카라는 땅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매사추세츠 해안 저멀리 약속의 땅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례자들은 영국을 떠난지 66일만인 1620년 11월 21일(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11일)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렸다. 당초 목적지는 버지니아 식민지 소속 허드슨강이었으나 풍랑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고 긴 항해에 기진맥진해 더 이상 항해를 포기하고 마치 일부러 넓게 방파제를 둘러놓은 듯한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렸다.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에서 1천㎞나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린 것을 두고 오늘날까지 “실수다”, “고의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청교도들은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 끝에 한 곳을 선택했다. 그들보다 앞서 이곳을 탐험했던 모험가 존 스미스(1580~1631)가 ‘플리머스’라고 이름 붙인 곳이었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출발해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도착한 셈이니 우연치고는 큰 우연이었다.
이들보다 앞서 미국 땅을 밟은 영국 정착민도 있었다. 월터 롤리는 1585년 로어노크섬을 식민지로 삼고 인근 땅을 처녀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버지니아로 명명했다. 버지니아 회사가 모집해 세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온 104명(승선 때는 144명)은 1607년 4월 26일 버지니아주 체서피크만에 도착해 당시 국왕의 이름을 딴 정착촌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집단으로 이민하고 자체 규약을 맺어 공동체를 이룬 것은 메이플라워호 승객들이 처음이어서 의미가 다르다.
그런데 순례자들이 상륙하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함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식민지 건설노무자들이 영국 왕실로부터 정착 허가를 받은 땅이 아니라면서 불만을 제기했다. 금방 폭동이라도 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순례자들은 미지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가 주민의 평등권과 자치권 보장에 관한 이른바 ‘메이플라워 협약서(Mayflower Compact)’다. 현존하는 필사본에 의하면 자주적인 식민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의해 행정을 운영하며, 공정하고 평등한 법률을 제정하고 준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서약에 기초해 존 카버(1576?~1621)를 초대 총독으로 선출했다. 그는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레이던으로 이주했다가 자본주의의 타락을 목격하고 신대륙에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던 지도자였다.

혹독한 겨울 보내니 추위·굶주림·질병으로 거의 절반이 죽어

▲ ‘메이플라워 서약’ 장면(1899년, Jean Leon Gerome Ferris 그림)

11월 21일(당시 영국이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11일) 일단의 무장 선발대가 상륙용 보트를 타고 육지에 내려 이곳저곳을 정찰하고 약간의 땔나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은 주일이어서 쉬고 13일에는 부녀자들이 밀린 빨래감을 가지고 해안으로 내려가 빨래를 했다. 이후 한 달 동안 낯선 땅을 정찰하고 땔감과 식량을 조금씩 조달하니 그곳이 정착하는데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매서운 한파가 닥쳐오고 있었다. 빨리 거처를 마련해야겠기에 12월 21일(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11일) 모두 해안에 상륙했다. 이때의 상륙을 기념하는 것이 지금도 플리머스 해안가에 놓여있는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다. 표면에 ‘1620’이 새겨져 있다. 물론 신대륙에 처음 상륙할 때 밟은 바위를 기억하고 보존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낮으므로 후손들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순례자들이 신대륙에서 맞은 첫해 겨울은 혹독했다. 결국 이듬해 봄이 왔을 때 추위·굶주림·질병으로 거의 절반인 46명이 죽었다.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원주민(아메리카 인디언) 왐파노악족이었다. 그중에는 뜻밖에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인디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사모세트는 원래 메인주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데 이곳을 탐사하던 영국 탐험대를 따라 캐나다의 뉴펀들랜드까지 동행한 적이 있어 영어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인 스콴토는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영국으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한 식민회사의 간부를 따라 뉴잉글랜드로 돌아온 원주민이다.
곧 이들을 통해 플리머스의 본래 지명은 파우툭세트라는 것, 1617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이곳에 살던 인디언 촌락민들이 대부분 희생되었다는 것, 이 지역의 여러 인디언 부족 중에서 최강의 부족은 플리머스 서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나라간세트만 일대에 살고 있는 왐파노악족이고 추장은 ‘위대한 추장’이라는 뜻의 마사소이트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례자들은 1621년 3월 22일 전사들과 함께 그들을 찾아온 왐파노악족 추장과 우호협정을 맺었다. 정착민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들의 호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주신 특별한 도구였다고 생각했다. 정착민들은 옥수수 재배법, 물고기 잡는 법, 단풍나무 즙을 채취하는 방법, 노루 등 짐승을 사냥하는 법 등을 원주민들에게서 전수받았다. 어느덧 해안지대 여기저기를 탐색하며 인근의 인디언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하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던중 왐파노악족 추장과 평화협정을 맺고 정착에 힘썼던 카버가 1621년 4월 들판에서 일하다가 쓰러져 숨을 거두는 슬픔을 겪었다. 후계자는 카버와 함께 레이던에서 생활했던 윌리엄 브래드퍼드였다. 세 차례나 총독으로 뽑혀 정착촌의 기반을 마련했다. 회고록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를 남겨 ‘미국 역사의 아버지’이자 ‘미국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끔찍한 살육전 벌어져

▲ 코드곶만과 플리머스 위치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아름다웠고 옥수수는 대풍이었다. 그들은 10월 어느날을 ‘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정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왐파노악 추장과 전사들도 초대했다. 감사 축제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흥겨움 속에 진행되었다. 푸짐한 음식과 과일에 포도주와 칠면조 고기까지 곁들인 흥겨운 잔치에 손님들은 흠뻑 빠졌다. 처음 맛보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에 취한 인디언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전통이 계속 이어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국경일로 선포하고, 1941년 연방의회에서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입법했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지금의 캐나다 지역에 진출한 프랑스인들, 지금의 올버니에서 뉴욕에 이르는 허드슨 강변에 식민지를 개척한 네덜란드인들이 옹색하고 보잘 것 없는 청교도 마을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원주민 부족들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것도 위협적이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621년 11월 11일 포춘호가 영국에서 35명의 성인 남녀들을 태우고 플리머스에 도착함으로써 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들 중에는 1년 전 먼저 온 정착민들의 가족들도 있어서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후 영국에서 건너오는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정착지 경제도 서서히 발전과 안정의 길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미국인들, 순례자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한 미국의 건국설화 믿지 않아

하지만 머지않아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1675~1678년 정착민과 왐파노악 인디언 부족 사이에 소위 ‘필립왕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발단은 영국 식민지들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 정책이었다. 위협을 느낀 인디언 5개 부족이 공동 전선을 펼치면서 전쟁은 확대되었다. 당시 왐파노악 부족의 지도자는 필립이었다. 전쟁은 미국 내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치열했다.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동맹의 결속된 힘이 바탕이 되어 결국 식민지 측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대가는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정착민들은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명 손실을 당하고 12개 정착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원주민들이 입은 피해가 그보다 훨씬 더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순례자들의 미국 상륙을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인들은 순례자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한 미국의 건국설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순례자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게 미국의 건국설화로 만들어진 건 1930년대 뉴딜 대공황기 때이다. 당시 미국의 사회통합을 위해서 상징조작 차원에서 설화를 만든 것이다.
건국설화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뉴욕은 네덜란드 식민지로 시작하고 버지니아는 영국의 왕립농장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건국설화는 백인들의 다른 건국 계기와 동기들이 묻혀지는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원주민으로 살았던 인디언들, 원치 않았지만 미국으로 끌려왔던 흑인을 비롯한 많은 노예들, 이 사람들이 건국에 기여한 사실들이 사상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국설화의 상징조작은 미국의 학계는 물론 정부나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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