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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0년 09월 09일 (수) 18:30:55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애국가’ 교체 논란에 휩싸인 작곡가 안익태의 삶

김원웅 광복회 회장이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위와 표절문제는 이미 음악계나 역사학계에서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애국가 교체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원희룡 제주지사는 “안익태가 나중에 나치 행각을 한 건 맞지만 애국가를 작곡하고 공연할 당시에는 이게 일본에 대한 독립을 위한 노래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미국에서 공연을 했었다”고 반박했다. 안익태의 삶을 살펴본다.

3·1운동 후 죽는 날까지 디아스포라의 삶 살아
안익태(1906~1965)는 평양에서 태어나 1918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첼로를 사 준 형과, 숭실중학 교장 모리(Mowry E.M.) 박사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주면서 첼로에 푹 빠졌다.
1919년 3·1 운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아 이후 평생 해외로 떠돌았기 때문이다. 퇴학을 안타깝게 여긴 모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중학(1921~1926)과 도쿄고등음악학교(1926~ 1930)에서 첼로를 공부했다. 1930년 귀국, 평양에서 첼로 독주회를 열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자 “조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죽는 날까지 사실상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 안익태가 먼저 찾아간 곳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였다. 그곳에서 동포들이 부르는 애국가를 들으며 “언젠가는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당시 동포들이 부른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작자 미상의 노랫말을 붙여 만든 곡이었다.
안익태는 1930년 입학한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음악 공부를 하는 한편 1931년 신시내티 시립교향악단에 동양인 최초의 첼로 연주자로 입단해 연주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다가 1932년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겨 커티스 음악원과 템플대 음악대학에서 첼로와 함께 작곡과 지휘도 공부했다.
안익태는 1933년 4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보고 느낀 게 많았다.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안익태와 친하게 지낸, 필라델피아 템플대 신문학과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한흑구의 수필집 ‘인생산문’(1974) 부록에 실린 ‘안익태 교우록’에 따르면, 안익태는 당시 연주회에서 공연된 ‘러시아 환상곡’에 영감을 받아 ‘한국환상곡’을 쓰기로 결심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한국환상곡’이 중요한 것은 이 곡에 현재의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1933년 겨울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응시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안익태 교우록’에 의하면 안익태는 이후 한흑구가 미국을 떠난 1934년 3월까지 총 4번의 편지를 한흑구에게 보냈는데 그 중 첫 번째 편지에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2등으로 입상한 후 뉴욕 제2심포니의 제1첼리스트로 채용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두 번째 편지에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자신이 얼마 전 완성한 ‘한국환상곡’을 직접 지휘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로 미루어 ‘한국환상곡’은 1934년 3월 이전에 작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익태는 1937년 11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안익태의 음악적 재능은 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무엇보다 감격적인 순간은 아일랜드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한국환상곡을 초연한 1938년 2월 20일이었다.

임시정부, 안익태 작곡 애국가를
국가로 공식 채택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에서 애국가 악보를 떼내, 작자 미상의 노랫말을 붙여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 보냈다. 재미 동포 단체들은 ‘대한국 애국가’라는 제목을 달아 중국의 중경 임시정부에 애국가로 제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애국가는 1940년 12월 임시정부에 의해 국가로 공식 채택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69호에는 “북미 대한인회가 안익태 작곡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후 임시정부와 미국 동포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 잃은 설움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애국가 악보를 국내외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된 ‘한국 애국가’ 악보집을 1945년 11월 12일 중국에서 발간했다.

▲ 1940년 부다페스트발 로마행 기차에 오른 안익태

안익태는 1938년 한국환상곡을 초연한 후 독일로 건너가 당시 세계 최고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문하에 들어갔다. 안익태는 스승 덕에 193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을 처음 지휘했다. 이후에도 슈트라우스의 후원으로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를 순회하며 1940년부터 1944년까지 60여 개의 세계적인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한국환상곡도 10차례 이상 지휘했다. 베를린에서는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당시 연주한 한국환상곡 악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친필이 적힌 1944년판, 1950년판, 1953년판, 1954년판, 연도 미상판이 전해지고 있다. 안익태 자신이 생전에 연주할 때마다 계속 악보를 고쳤기 때문에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판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다. 한국환상곡의 초기 곡은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1부), 일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담한 모습(2부), 광복의 기쁨을 맛보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3부)으로 나뉜다. 이후 1950년대 중반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4부) 부분이 추가되었다.
해방 후 안익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1946년 스페인 지중해에 있는 마요르카에 안착했다. 그곳에서 스페인 여성과 결혼하고 막 창단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창단 및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46년부터 일부에서 불리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애국가는 1984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2007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등에서 국가로서의 법적 근거와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물론 ‘국가는 애국가’라고 명시한 법률 조항은 없다. 저작권은 2005년 2월 유족 측이 대한민국 정부에 저작권을 양도해 현재는 우리 정부가 저작권을 갖고 있다.
안익태는 해방 후에도 외국에서 순회연주를 하다가 고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하 연주를 위해 1955년 3월 귀국했다. 이후 매년 한 차례 방한했으나 국내 음악계 인사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안익태의 고집스러운 행동의 충돌로 결국 국내에 안착하지 못했다. 주로 마요르카에 머물다가 1965년 9월 16일 59세 나이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1977년 7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묘지 묘역에 안장되었다.

안익태의 친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애국가 유지·교체 주장 맞서

안익태를 둘러싼 친일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2006년부터였다. 그가 친일 행위자로 분류된 근거는 1938년 ‘에텐라쿠’라는 천황 찬양 음악을 작곡하고 독일에서 일독회(日獨會)라는 친나치 단체에 가입했으며 1942년 9월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열린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익태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형 일장기가 무대 중앙에 걸려 있는 곳에서 만주국 창설을 기념하는 음악회 공연을 지휘한 것은 공연 필름이 발견되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다만 ‘에텐라쿠’가 천황을 찬양하는 음악이라는 주장은 ‘에텐라쿠’가 조선 아악을 주제로 만든 ‘강천성악’의 일본식 발음이기 때문에 오해라는 반론도 있다. 두번째 논란은 정치학자 이해영이 ‘안익태 케이스’(2019년)를 출간하면서 일었다. 이해영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을 밝히면서 일본 외교관의 베를린 집에 머물면서 스파이 역할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익태를 연구한 음악학자들은 안익태의 애국심도 친일 행적만큼이나 확실하다며 정치적 공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안익태 기념재단은 “1919년 3·1 운동 때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제적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 ‘한국환상곡’을 썼던 1930년대 중반까지는 미주 한인 신문 ‘신한민보’에 식민지 조국에 대한 슬픔을 토로했다. 특히 애국가를 작곡하면서 “사방으로 헤매이는 불쌍한 우리 이천 만 동포”라는 표현을 신문에 기고하며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꿈꿨다.
그럼에도 1940년대 안익태의 유럽활동이 친일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주국 10주년 경축 음악을 작곡·지휘한 것 뿐아니라 1940년 로마에선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 3국 동맹의 축하 무대에도 지휘자로 섰다. ‘나치 제국음악협회’ 회원이기도 했는데 회원증에는 출생지가 평양이 아닌 도쿄로 표기되어 있고 이름은 ‘에키타이 안(Ekitai Ahn)’다.
그런데 친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자동적으로 불려나오는 게 현재의 애국가를 유지할 것인가 바꿔야 할 것인가 문제다. 물론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소수에 불과하다. 애국가 유지 주장은 이렇다. 안익태의 애국가를 대한민국의 국가로 만든 것은 미국 동포, 독립군, 임시정부 그리고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를 되찾고 감격을 나누던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기 때문에 애국가를 교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애국가는 5·18 광주 민주화항쟁 때도 전남구청 앞에서 불렀던 애국가이고, 6·10 항쟁 때에도 불렀던 애국가이며, 2년 전에 촛불광장에서도 불렀던 우리 국민 애국가이다”고 강조했다.

애국가 작사자 논쟁… 결정적 근거·사료 없어
진영에 따라 윤치호설·안창호설로 갈라져

국가(國歌) 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19세기 말 각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활발해지고 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고조되어 필요성을 실감한 대한제국 정부가 ‘애국가 제정위원회’를 발족하면서였다. 독립신문도 1896년 4월부터 각종 애국가류를 소개하면서 1896년 9월 22일자 논설을 통해 국가 제정과 보급 운동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대한제국 애국가,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
이 땅에서 사라져

독립신문을 통해 확산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공립신보 등의 신문과 각종 학회지 등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애국가류 노래가 ‘애국가’, ‘국민가’, ‘독립가’, ‘찬미가’, ‘대한가’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민간에서 애국가 부르기와 국가 제정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대한제국 정부가 애국가를 제정한 것은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내한해 황실 군악대를 조직한 독일 출신의 프란츠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든 1901년이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고종의 50주년 탄신일인 1901년 9월 7일 초연되었다. 당시 에케르트가 지휘하는 서양식 군악대는 고종과 각부 대신, 각국 외교사절 앞에서 첫 연주회를 열면서 대한제국 애국가도 연주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1월 황실의 신년 하례식 때와 1902년 3월 17일 황태자(순종)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하 연주회 때도 연주되었다. 1902년 7월 1일에는 독일에서 인쇄한 500부의 악보가 주한 외국 공사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애국가는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금지곡으로 묶여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새로운 애국가류가 민간에서 애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에 작자 미상의 가사를 붙여 만든 애국가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안익태 작곡 애국가가 공식적으로 우리의 애국가로 지정되자 가사를 누가 썼는지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가 주관하고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1955년 4월 4일부터 5월 23일까지 조사를 벌였다.
위원회는 윤치호·안창호·최병헌·김인식·민영화 등 단독 작사자설과 합작설, 개작설 등 여러 주장을 면밀히 검토했으나 결국 밝히지 못해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윤치호 11명, 안창호 2명으로 갈라져 결국 ‘작자 미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윤치호가 가장 유력하지만 결정적인 근거가 없어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윤치호설·안창호설 대립
이후 각종 근거 자료가 발견되어 논쟁에 불을 지폈다. 윤치호설 옹호론자들은 한 소책자를 근거로 “윤치호가 1907년 애국가를 작사했고 1908년 발행한 찬미가를 통해 보급했다”고 주장한다. 1908년 6월 25일 광익서포가 발간한 찬미가는 ‘윤치호 역술(譯述)’이라고 적혀 있는 16쪽짜리 소책자다. 찬미가는 윤치호가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 펴낸 노래집으로 15곡의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뒷부분에 현재의 애국가 가사와 동일한 ‘애국적 찬송가’가 실려 있는데 전체 15곡 중 12곡은 번역 가사이고 애국가 등 3곡은 윤치호의 창작이다. 애국적 찬송가에는 ‘올드 랭 사인’에 맞춰 부르라고 명시되어 있다. 다만 애국가 가사 중 일부가 독립신문 1899년 6월 29일자 배재학당 방학 예식 기사에 실린 무궁과 4절(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름 죠션으로 기리 보죤하게)과 같다는 점에서 완전 창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 윤치호(왼쪽)와 안창호

윤치호설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에는 미주 지역의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실린 ‘국민가’라는 4절 노래도 있다. 가사는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곡명 밑에는 ‘윤티호’라고 작사자를 밝혀놓고 있다. 당시 신한민보는 안창호가 이끄는 국민회가 발행했기 때문에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면 신한민보가 윤치호를 거명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윤치호 자신도 1945년 12월 사망 직전 자필 ‘가사지’ 말미에 작사 연대를 1907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1954년 11월 한국태평양출판사 이름으로 미국에서 발간된 ‘한국 입문’에도 애국가 악보에 작곡자를 안익태, 작사자를 윤치호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안창호설 옹호론자들은 “1907년 3월 안창호가 평양에서 애국가를 작사했으며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앞장서 보급했다”고 주장한다.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은 안창호가 ‘의무균명학교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했다‘는 내용의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자 기사를 근거로 제시한다.
또 상해 임시정부 시절 3년간 안창호의 비서를 맡았던 구익균이 “당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안창호에게 묻자 ‘(내가)맞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증언한 것도 증거로 내세운다. 현재로서는 윤치호설에 무게가 실리긴 하지만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없어 여전히 ‘미상(未詳)’으로 전해지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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