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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는 항일무장투쟁사에 기록된 최대 승전보… 100년 전 이맘때 일본군을 향한 독립군의 함성과 총성이 만주 북간도에 울려퍼졌다
2020년 06월 06일 (토) 01:56:2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홍범도(1868~1943)와 김좌진(1889~1930)은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거봉이자 영웅이다. 두 장군이 활약을 펼칠 무렵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는 독립군들의 주무대였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많은 독립군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독립군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3·1운동 후 무장 독립군, 북간도 거점 삼아 국내 진공작전 펼쳐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북간도를 무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설되고 있을 때 홍범도 역시 1919년 5월 이곳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3·1운동 후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공작전 중 첫 공격이었다.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침투, 일제의 통치기관을 급습하고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을 거쳐 자성군까지 진출,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하는 승전보를 알렸다. 이는 독립군 부대가 국내로 진공해 이룬 최초의 승전이었다.
대한독립군의 기세가 이처럼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무기와 병참은 늘 부족했다. 홍범도는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919년 겨울 대한국민회 산하 소속으로 들어갔다.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일대의 조선 교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400여 명의 국민회군을 직속 부대로 두고 있었다. 대한독립군은 대한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병력을 400여 명으로 늘리고 무기를 증강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을 연합한 전체 부대를 지휘했다. 최진동이 지휘하는 600여 명의 군무도독부와도 1920년 5월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규모 연합부대 진용을 갖췄다. 대한북로독군부는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아 최진동이 총지휘를 맡고 홍범도는 군사령관을 담당했다.
이처럼 독립군 부대가 단일 대오로 합치는 과정 중에도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계속되었다.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와 낮에는 산악 지대나 밀림 지대에 잠복해 있다가 밤이 되면 일제의 주요 기관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군 측 자료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6월 초까지 국내 진공 유격전은 총 32회에 달하고 파괴된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는 34개소나 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대 무력 항일투쟁의 신호탄

▲ 영화 ‘봉오동 전투’(2019년 개봉) 포스터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신민단 소속 30여 명의 독립군이 박승길의 지휘 하에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국경 초소를 급습했다. 격분한 일본군 1개 중대가 두만강 국경을 건너 신민단의 뒤를 쫓았으나 독립군은 길림성 화룡현 삼둔자에 몸을 숨긴 뒤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애꿎은 양민들만 무차별 살육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독립군은 산기슭에 잠복해 있다가 철수하는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봉오동 전투의 서전을 장식한 ‘삼둔자 전투’였다.
그러자 함북 청진시 나남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제19사단이 월강(越江) 추격대대를 편성, 6월 6일 밤 두만강을 건너 6월 7일 새벽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왔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곳으로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에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지였다. 대한북로독군부를 주축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이 다가오자 산 위 요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일본군이 고려령 골짜기 입구에 다다른 6월 7일 오전 6시 30분쯤,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고려령 길목인 안산과 고려령 입구에서도 연거푸 교전하는 체하면서 일본군을 봉오동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았는데도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하고 독립군의 뒤를 쫓는 데만 급급했다.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귀를 통과하고 주력부대가 포위망 한가운데로 들어설 즈음인 오후 3시쯤, 700~900명의 독립군 총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나왔다. 3면 고지에서 가해지는 일제 사격으로 일본군은 3시간 동안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독립군은 도주하는 일본군마저 추격해 타격을 가했다. 일본군 패잔병은 도주하면서도 봉오동의 조선인 민간인 16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300여 명이 부상했다. 독립군은 사망 4명에 중상 2명뿐인 대승이었다. 다만 사상자 통계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는 일본군 150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하고 홍범도는 자신의 일지에 310명의 일본군이 사살되었다고 기록했다. 일본은 전사 1명, 부상 1명으로 축소 발표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전이고 이를 계기로 무장투쟁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의 신호탄이었다.

홍범도와 김좌진은 항일무장투쟁사의 두 거봉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하자 새로운 대책을 강구했다. 만주 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해 장작림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일본군이 직접 독립군을 공격하는 양면 작전을 병행하기로 했다.
장작림은 1920년 7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일본에 약속했으나 장작림 부하 중에는 조선 독립군 토벌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대한국민회가 중국 관리 맹부덕과 비밀 타협을 벌일 수 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타협의 요지는 장작림 부대가 일본군의 압력 때문에 부득이 독립군 수색을 위해 출동해야 하므로 독립군이 근거지에서 벗어나 일본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 지대로 이동하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타협에 따라 길림성의 연길현, 훈춘현, 왕청현, 화룡현의 4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각 독립군 부대는 1920년 8월 하순,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9월 21일 안도현과 접경 지대인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터를 잡았다. 안무의 국민회군은 9월 말 이도구에 도착했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는 9월 말 나자구에 도착했다. 의군부, 신민단, 광복단 등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모두 근거지 이동을 단행했다. 왕청현 서대파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9월 중순 이동을 시작해 10월 12~13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터를 잡았다.
장작림의 군벌군은 1920년 8월 28일부터 9월 27일까지 1개월간 조선인 독립부대를 수색 토벌한다며 출동했다가 독립군 부대가 떠나 비어 있는 근거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요구에 따르는 척했다. 결과적으로 중국군을 동원해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군을 토벌한다며 8월에 일본군이 확정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도 차질이 빚어졌다. 간도가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무작정 간도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간도 침입의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이때 조작한 것이 ‘훈춘 사건’으로 불리는 만주 마적단의 훈춘성 습격 사건이다. 일본군은 중국 마적단 두목 장강호를 매수했다. 장강호는 10월 2일 새벽, 훈춘을 습격해 일본영사관과 상가에 불을 지르고 숙직 경찰관을 살해한 뒤 달아났다. 400여 명의 마적 떼 공격으로 일본인과 한국인 13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기록된 최대 승전보

일제는 간도 침략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 사실을 적극적이고 과장되게 발표한 뒤 10월 7일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 일제는 장작림 군벌 정부의 간도 출병 불허에도 10월 14일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선언하고 10월 17일 0시를 기해 조선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독립군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의 규모는 엄청났다. 함북 청진시 나남의 19사단 대부분, 서울 용산의 20사단 일부, 러시아령 연해주에 주둔 중인 11, 13, 14사단 일부 등 총 2만 5,0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가장 앞장선 부대는 19사단이었다.
일본군과 독립군 간의 첫 전투는 김좌진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계곡 백운평에서 벌어졌다. 청산리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양편에 솟아 있는 길고 좁은 계곡으로 이곳을 지나려면 반드시 백운평을 거쳐야 했다. 김좌진 부대가 상대할 일본군은 중화기로 무장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군을 두 부대로 나눠 자신이 제1제대를 지휘하고 휘하의 이범석에게 제2제대를 맡겨 백운평의 유리한 고지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접근해 오면 포위 공격하는 작전을 짰다. 200여 명의 일본군 전위부대가 백운평에 다다른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김좌진의 공격 개시 명령과 함께 600여 명의 독립군이 백운평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30분 동안 계속된 공격에 일본군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궤멸했다. 청산리 전투의 첫 승전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일본군 본대를 피해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께 이도구 갑산촌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뒤늦게 달려온 일본군은 백운평 주민들에게 무차별 보복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50~60 가구 300명 정도이던 주민 대부분은 잔인하게 살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그 무렵 또 다른 일본군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은신하고 있는 이도구 어랑촌으로 접근했다. 홍범도 부대는 기민하게 산속에 숨어 있다가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어랑촌 길목에 있는 이도구 완루구에서 적을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이 공격으로 4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또다시 궤멸했다.
이도구 갑산촌에 도착한 김좌진 부대 역시 밤샘 행군에 몸이 파김치가 되었는데도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천수평으로 달려가 22일 새벽 5시 30분경 일본군을 기습함으로써 300여 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유격전

김좌진은 천수평 전투 후 획득한 문서를 통해 일본군 본부가 이도구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완루구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해 어랑촌의 유리한 고지에 매복했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2,000여 명, 일본군은 5,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터라 사실상 청산리 전투의 최대 승부처였다. 10월 22일 아침 7시 30분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은 1,000여 명(이범석)~1,200여 명(박은식)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독립군도 10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일본군이 워낙 막대한 손실을 입어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전투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유격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랑촌 전투는 치열했던 만큼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인근의 조선족 여성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립군에게 음식물을 날라다 주어 독립군의 사기를 높였는가 하면 행군 도중 오발로 전우를 죽게 해 쇠로 만든 용수를 쓰고 전투에 참가한 한 병사는 죽은 전우 몫까지 대신한다며 적진 깊이 뛰어들어 전사하기도 했다.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은 뒤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해 180도 회전하며 총격을 벌이다가 기관총탄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는 어랑촌 전투를 끝내고 소부대로 나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도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보산 전투 등을 벌이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야습을 받고 인근 절벽으로 피신했다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재야습을 가해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떨어뜨린 10월 25일 밤의 고동하 전투 역시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치열한 전투였다. 10월 26일 새벽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청산리 전투로 통칭되는 6일간의 크고 작은 전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청산리 전투 후 일본군은 총 2,000여 명의 시체와 1,300여 명의 부상자를 실어 날랐다. 독립군도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기록된 최대 승전보였다. 북로군정서가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 등 모두 1,257명이고 부상자는 2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의 요동일일신문과 박은식은 2,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추산했다.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되어 있다.
독립군 피해는, 직접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에 따르면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실종 200여 명에 불과했다. 실종자는 대부분 부대로 복귀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전사자 130여 명과 부상자 220여 명 등 약 35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산했다.

일제의 무차별 학살로 간도에 조선인의 피가 강물 이뤄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하자 간도의 조선인을 보복 대상으로 삼았다. 무장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조선인 마을은 모조리 파괴하거나 불태워 초토화했다. 1920년 10월부터 3개월에 걸친 간도 지방 조선인에 대한 대살육으로 간도에는 조선인의 피가 강물을 이뤘다. 일본군은 10월 22일에도 대한군정서의 근거지이던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 일대에 난입, 양민 150여 명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학살했다.
10월 30일에는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있는 기독교도 마을 장암동에 들어가 남자 33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3·1 운동 당시의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에 비견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이었다. 일제의 야수성을 그대로 보여준 장암동 마을 학살을 직접 목격한 미국의 한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을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했다. 이를 취재하던 동아일보의 장덕진 특파원도 실종되었다.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무차별 학살 후 상해 임시정부가 간도통신원을 통해 조사한 바(독립신문 12월 18일자)에 따르면 10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학살당한 조선인은 3,693명이었다. 소각당한 민가도 3,288채나 되었고 학교는 41개교, 교회는 16곳, 곡물이 5만 4,045석이었다. 학살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실제 피해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NM

▲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킨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장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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