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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하숙생’의 가수 출신 정치인 1호, 최희준의 삶과 노래[1]
허스키로 등장, 우리나라 가요계를 ‘미성의 시대’에서 ‘개성의 시대’로 바꾸다
2020년 06월 06일 (토) 01:44:2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1960년대, 허스키보이스로 등장해 우리나라 가요계를 ‘미성의 시대’에서 ‘개성의 시대’로 전환시킨 주인공, 가수 최희준(1936.5.30~2018.8.24). 1961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시작으로 ‘하숙생’, ‘맨발의 청춘’, ‘팔도강산’, ‘종점’, ‘진고개 신사’, ‘길 잃은 철새’, ‘뜨거운 침묵’, ‘광복 20년’...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60년대 최고가수다.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하게 여의도까지 진출했던 인물.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또한 서민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90년대에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의 지역구가 둘이라고 늘 강조하기도 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지역구인 안양 동안갑구,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가요계’라고 했을 정도로 가요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적이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과 한국문예진흥원장도 역임했다.

당시 대중들에겐 다소 생소한 재즈의 스윙 리듬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발표하며 끝없는 음악적 변신을 시도, 대중음악의 폭을 넓혔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리듬 사이를 드나들었던 가수 최희준의 삶과 노래, 그 첫 번 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다소 거친 음색에 보풀 심한 듯한 허스키, 그러나 털스웨터처럼 포근한 노래

▲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하게 여의도까지 진출했던 최희준씨

필자에게 ‘최희준’이라는 이름은 각별하다. 본격적으로 가요를 연구하는데 계기가 되어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음반들을 토대로 우리 대중음악 연구를 시작했다. 음반이 곧 모든 기록의 시작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가요 음반 수만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결코 음반 수집가는 아니다. 컬렉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를 위해 갖게 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직접 소장하고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노래가 우리 가요 중에는 의외로 많다. 그걸 가장 먼저 깨우쳐준 상대가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하는 가수 최희준 선생이다.

언젠가 뉴시스와의 인터뷰(https://news.zum.com/articles/2870288)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들어보지 못한 최희준 노래들을 찾다가 지금 이 길로 들어섰다.

돌이켜보자면 유년시절부터 그의 노래를 유독 좋아했다. 그러한 만큼 웬만한 최희준 노래는 모조리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가 발표한 음반들을 하나, 둘 씩 새롭게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간이 더해갈수록 그의 노래에 더더욱 빠져들게 된 것은 어떠한 노래든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의 친근하면서 허스키한 음색이 그저 편하게 들려 좋았다. 사람들의 감성을 매만져주는 포근함이랄까. 한편으로는 긁힌 듯, 음색이 마치 보풀 심한 털실처럼 다소 거칠지만 막상 몸에 닿으면 따스한 털스웨터, 즉 포근한 니트(knit)처럼 느껴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 최희준씨가 등장하던 60년대 초, 개성을 지닌 많은 미8군 가수들이 대거 가요계에 진입한다. ‘노오란 셔츠의 사나이’의 한명숙, ‘밤안개’의 현미... 당시 가요계에서는 이들 셋을 일컬어 ‘3대 허스키보이스’라 칭했다. 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가요계는 말 그대로 미성(美聲)의 가수들이 각광을 받았다. 속칭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꾀꼬리가수들’ 말이다. 그러나 갖가지 개성을 가진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가요계는 기존의 ‘미성(美聲)의 시대’에서 ‘개성의 시대’로 바뀜과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계의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최희준씨는 생전에 ‘자신은 목소리로만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의 폐활량은 남들보다 굉장히 적어서 가사를 마디마디 뚝뚝 끊어 노래를 하는 스타일. 사정이 그렇다 보니 자칫 듣는 맛이 떨어질 수 있어 감정을 깊게 표현, 이를 극복하려고 애썼다고 털어놓곤 했다.

 

별명은 ‘찐빵’,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무대에서 지어

▲ 전성기 시절의 최희준씨 음반들

서울대 법대 출신 가수, 그리고 실제로도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하게 여의도에까지 진출했던 인물.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또 서민들에게 친근함을 주는 인물이었다.
별명은 ‘찐빵’. 작고 통통한 외모 때문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별명이지만 사실 이 별명은 평소 모습 보다 무대 위에서의 모습 때문에 지어진 애칭이다. 평소 짧게 자른 스포츠형 헤어스타일 머리가 땀에 젖어, 무대의 조명과 열기로 인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이 꼭 찐빵 같다고 해서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지은 것. 이후 그는 ‘안녕하십니까, 찐빵 최희준입니다’라는 OO빵 CF까지 출연해 그의 별명은 더욱 유명세를 탔다.

본명 최성준(崔成俊). 1936년 부친 최한우와 모친 하상희 사이의 2남2녀 중 둘째로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초 중앙방송국 첫 출연 당시, 연주자로 활동하던 작곡가 김강섭, 손석우씨로 부터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이름에 '기쁠 희'자를 넣어 ‘희준(喜準)’이라는 예명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그의 성격은 매우 낙천적이었다. 특히 코미디를 좋아해서 함께 쇼에 출연하는 코미디언들이 내뱉는 대사를 즉석에서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유명한 코미디 광이기도 했다.

정감 있는 외모, 특히 웃는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의 캐릭터를 잘 살려준 노래가 데뷔 당시 발표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다. 익살스런 가사와 차차차 리듬의 이색적인 멜로디, 그리고 최희준씨의 친근하고 감성적인 목소리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대히트했다.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히스테리가 이만 저만/데이트에 좀 늦게 가면 하루 종일 말도 안해 What shall I do/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강짜 새암이 이만 저만/젊은 여자와 인사만 해도/누구냐고 꼬치꼬치 Oh, help me/우-------랄랄랄라/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서비스가 이만 저만/춥지 않느냐 뭐 먹겠느냐 털어 주고 닦아주고 Oh, thank you/아- 남들은 몰라요 아--- 올드미스 우리 애인 넘버원.’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손석우 작사, 작곡, 최희준 노래, 1961년)

미8군쇼 시절 ‘한국의 냇 킹 콜(Nat King Cole)’이라 불리던 최희준씨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에 등장하며 발표한 초기 히트곡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 AFKN을 즐겨 들었던 음악광
 

▲ (사진 위) 데뷔 초기의 최희준씨(왼쪽에서 두 번 째), 작곡가 이봉조, 가수 한명숙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아래) 동료가수 오기택씨와 장난치고 있는 최희준씨(우측)

경복고 시절부터 미군방송인 AFKN을 즐겨 들으며 당시 최신 팝송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던 그. 심지어 신곡이 나오면 교실 칠판에 가사를 적어놓고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친구들의 음악선생이었던 셈.


그렇지만 대학 전공은 법학을 선택한다. 법관이 되길 바라는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법대를 다니던 최희준씨가 가수로의 꿈을 키우게 된 동기는 서울대 시절, '장기놀이대회'에 법대 대표로 출전하면서부터. 평소 좋아하던 팻분의 '아일 비 홈'과 샹송 '고엽(枯葉)'을 불러 앙코르 세례를 받으며 한순간에 서울대 명물로 떠올랐다. '서울대에 가수가 떴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담장 밖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친구의 형인 김안영씨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파피(poppy, 테너 색소폰)’라는 예명으로 미8군 쇼에서 '파피밴드'를 이끌고 있었다.

그 무렵 음악애호가들이 많이 모이던 학교 근처의 '별장다방'엘 수시로 드나들던 탓에 사법고시에서 고배를 맛보았고 공교롭게 이때 그를 찾아온 파피의 끈질긴 권유에 의해 결국 미8군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다.

첫 무대는 그해, 1959년 4월 15일 용산 삼각지 근처의 사병(EM)클럽이었다. 쇼단은 파피가 속한 '쇼보트'. 그리고 의정부하사관클럽으로 두 번째 무대가 이어졌다. 집에는 미군부대에 통역관으로 나간다고 둘러댔다.

미8군쇼 무대에 서려면 3개월에 한 번씩 오디션을 거쳐야 할 정도로 엄격했는데 이때 최희준은 냇 킹 콜의 노래를 밤새 틀어놓고 따라하면서 심지어 숨소리까지 흉내 냈다. 결국 그에겐 ‘한국의 냇 킹 콜’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미8군 무대에서의 수입도 괜찮았는데, 그의 출연료, 즉 월급은 당시 돈으로 20만환으로 당시 은행원들 월급의 네 배 정도나 되는 금액이었다.

 

‘월급 20만 환의 A급 가수’로 미8군 클럽 무대에 서다

일약 미8군쇼 계의 유망주가 된 그는 전국 각지의 미군 캠프로 공연을 다녔다. 용산은 물론 의정부, 부평, 오산, 춘천, 부산까지. 햇볕을 가릴 천막도 없는 군용트럭을 타고 비포장 길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늘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때문에 공연 전부터 이미 녹초가 되었지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8군쇼 단체 ‘파 이스트 폴리스’에서 2개월을 보낸 뒤 ‘섬머타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섬머타임’은 당시 미8군쇼에 출연하는 20~30여 개의 각종 단체 가운데 최정상급이었다. 특히 한창 미국에서 유행하던 쿨 재즈나 프로그레시브 연주에 정평이 나 있었다. 후에 이름이 ‘A트레인’으로 바뀐 이곳에는 최상용(트럼펫)과 강철구(테너 색소폰)가 악장을 지내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후에 KBS 악단장을 지낸 김강섭이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했다.

61년 9월,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최희준은 이들과 함께 A트레인의 간판주자로 활동했다. 미8군쇼에서 3년 간 활동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가 쇼단을 떠난 뒤 왕손가수 이석과   조영남이 바통을 이었다.

한 달 간의 오키나와 원정공연도 이루어졌다. 오디션에서 A트레인이 ‘스페셜 A'를 따낸 것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어느덧 최희준은 8군쇼 스타 반열에 올랐다. 미8군쇼 스타들로만 구성된 ‘세계의 휴일’ 무대에도 섰다. 그가 남긴 회고다.

“당시 최고 미8군 스타들로만 구성된 ‘세계의 휴일쇼’는 공연 때마다 만원관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지요. 부산 제일극장으로까지 앙코르공연이 이어졌어요. 그러나 쇼도 쇼였지만 무엇보다 내 존재가 대중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 기뻤죠. 신의 가호였을까. 마침 그때 극장 어느 곳에선가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었죠. 쇼 이전 동료가수 김성옥의 소개로 이미 서로 만나 적이 있으나, 그뿐이었죠. 하지만 이 공연을 계기로 손선생과의 인연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작곡가 손석우와 손잡고 첫 우리 가요 음반 발표

▲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자주 제작하던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된 최희준 음반들

이로부터 몇 년 후인 1967년, 최희준은 당시 DBS(동아방송)에 출연해 데뷔 동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미8군쇼에 나가면서 처음으로 손석우 선생 작곡의 ‘그림자’와 ‘목동의 노래’를 녹음했어요. 저는 처음 안한다고 했지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외국에 나가있는 가수 김성옥씨가 계속 권유를 해요. 남의 노래, 그러니까 외국곡을 앵무새처럼 흉내만 낼 게 아니라 자기 노래를 하나쯤 두고 두고 남길 생각이 없냐고. 처음에 난 음악적인 실력도 그렇고 도저히 내 능력이 안돼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한번 해보라고 자꾸 부추기더군요. 그래서 결국 작곡가 손석우 선생님을 만나 뵈었지요.”

이 회고담이 그렇듯 가수 최희준을 있게 한 인물이 바로 작곡가 손석우다. 이 무렵 손석우 선생은 중앙방송국(현 KBS) 가요방송 지휘자로 활동하며 새로운 음반사, 뷔너스(VENUS)레코드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이 뷔너스레코드 1호 음반에 ‘노오란 셔츠의 사나이(한명숙)’를 비롯해 최희준의 노래 두 곡이 담겼다. 이 노래가 바로 미8군쇼 시절의 최희준이 우리 가요를 취입한 첫 데뷔곡이다

‘어딜 가도 소리 없이 따르는 그림자/불러 봐도 자취 없는 이상한 그림자/어느 때나 이 발길을 뒤쫓는 그림자/이 마음을 무겁게 뒤덮는 그림자/가거라 멀리 그림자여 꺼져라 아주 그림자여/어딜 가도 소리 없이 따르는 그림자/이 마음이 편안하게 꺼져라 그림자’ -그림자(손석우 작사, 작곡, 최희준 노래, 1961년)

‘끝없는 광야 오늘도 하루/소와 말을 동무 삼는/나는 외로운 목동/흘러 흘러서 가는 곳 어데/동서남북 바람 부는 대로/그리운 고향에는 언제 가보나.

무정한 세월 오늘도 흘러/푸른 하늘 지붕 삼는/나는 외로운 목동/눈을 붙이고 꿈이나 꾸리/부모 형제 정든 마을 사람/그리운 사람과는 언제 언제 만나나.’-목동의 노래(손석우 작사, 작곡, 최희준 노래, 1961년)

늘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던 손석우, 그만큼 늘 '새로운 목소리' 또한 필요했다. 바로 이 즈음에 눈에 띈 가수가 바로 최희준, 한명숙, 김성옥, 최양숙, 현미, 김상희 등이었다. 생전에 최희준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손석우 선생이 이런 제안을 하셨어요. ‘우리 가요의 선율과 가사 등의 수준을 지금보다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일을 같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때 나는 이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죠. 전후 미8군쇼를 중심으로 소개되던, 이른바 'GI(Government Issue, 미군병사를 지칭) 문화'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 가요의 자생력을 키워보자는 말이었지요.”

그렇게 그는 손석우 선생과 의기투합, 첫 취입곡인 ‘그림자’와 ‘목동의 노래’를 비롯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내 사랑 쥬리안’, ‘하모니카 블루스’, ‘푸른 코트의 여인’을 비롯한 30여 곡을 잇달아 뷔너스 음반사 레이블로 발표한다. 가요계 데뷔 불과 2년 동안의 일이었다. (계속)

▲ 데뷔 초기 한 월간지에 실린 기사. ‘손석우씨가 추천하는 톱싱거’라는 타이틀로 가수 최희준과 한명숙씨가 함께 했다.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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